글로벌 헬스케어 기술기업 필립스(Royal Philips, NYSE: PHG)가 유럽연합(EU)의 새로운 녹색채권 기준에 맞춰 6억5000만 유로(약 1조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한다. 헬스케어 산업에서 EU의 유럽 녹색채권(EuGB·European Green Bond) 기준을 적용한 첫 사례다.
필립스는 2034년 만기 고정금리 채권 6억5000만 유로의 발행 가격을 확정했다고 24일(현지시간) 밝혔다. 발행 가격은 액면가의 99.655%이며 쿠폰금리는 연 4.0%다. 이에 따른 발행 수익률은 4.055%로 결정됐다. 만기는 약 7.8년이다.
투자자들의 반응도 상당했다. 이번 채권은 발행 규모의 2.7배에 달하는 초과청약을 기록했다. 발행 및 결제는 28일 진행될 예정이며,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 공식 목록에 등재돼 규제시장에서도 거래될 예정이다.

‘그린’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안 된다
이번 채권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필립스가 친환경 채권을 발행했다는 데 있지 않다. EU가 녹색채권의 이름과 자금 사용처를 직접 연결하는 제도적 틀을 만들었고, 필립스가 헬스케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그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EU는 2023년 유럽 녹색채권 규정(EU Regulation 2023/2631)을 마련해 이른바 ‘EuGB’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채권에 통일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EuGB는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경제활동에 자금을 투입하도록 하고, 발행 전후의 투명한 정보공개와 외부 검토 등을 요구한다. 핵심은 기업이 친환경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 조달자금이 어떤 경제활동에 투입됐고 환경적 목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투자자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EU가 이 같은 기준을 마련한 배경에는 녹색채권 시장의 급성장과 함께 ‘그린워싱’ 우려가 커진 데 있다. 기존 시장에서는 녹색채권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자금의 실제 환경적 효과를 비교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EU는 EuGB를 통해 녹색채권 시장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이고 투자자가 채권의 지속가능성을 보다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필립스가 택한 ‘의료기기+순환경제’
필립스가 이번 채권으로 조달한 자금은 EU 택소노미에 부합하는 경제활동에 투입된다. 회사는 이를 통해 2030년 임팩트 목표 달성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투자 방향이 의료기기 제조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에너지 효율적인 제품 설계를 확대하고 의료기기 사용 단계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줄이는 한편, 제품의 재사용과 재활용 등 순환경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낮추기 위한 구매 전략도 포함된다.
이는 의료산업의 ESG 전략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병원에 납품하는 의료기기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제품을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폐기되는 장비와 부품을 얼마나 재활용할 수 있는지, 제조·운송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발생하는지까지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로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립스는 2045년까지 전체 가치사슬에서 온실가스 순배출량 넷제로를 달성한다는 목표도 제시하고 있다. 이번 녹색채권은 이러한 장기적인 목표를 선언에 그치게 하지 않고 실제 투자자금과 연결하는 수단인 셈이다.
‘ESG 비용’에서 ‘조달 경쟁력’으로
이번 발행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필립스의 재무전략이다. 회사는 이번 채권 발행으로 순부채가 증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2027년 5월 만기 도래 채권을 상환하기 전까지 총부채는 일시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필립스의 신용등급은 S&P BBB+, 무디스 Baa1, 피치 BBB+로 모두 안정적 전망이다.
2.7배라는 초과청약은 이 같은 재무적 안정성뿐 아니라 지속가능금융에 대한 기관투자가들의 수요가 결합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번 발행의 성공을 전적으로 ‘녹색채권 프리미엄’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친환경 투자 목적과 투자자금의 추적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EuGB가 대형 헬스케어 기업의 자본시장 접근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국내 의료산업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 국내 의료기기·제약·바이오 기업의 ESG는 주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나 기업 홍보의 영역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필립스 사례는 ESG가 ‘보고해야 할 비재무 정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본의 조건’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녹색금융 시대, 국내 의료기업도 준비해야
특히 유럽 시장을 겨냥하는 국내 의료기기 기업이라면 변화가 더 직접적이다. 제품의 에너지 효율, 탄소배출량, 원재료의 지속가능성, 공급망 배출량, 제품의 수리·재사용·재활용 가능성 등을 측정하고 데이터화 하지 못하면 향후 글로벌 조달시장과 투자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국내 의료기업도 전환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친환경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것을 ‘ESG 비용’으로 볼 것이 아니라, 녹색채권과 지속가능금융을 끌어올 수 있는 사업 자산으로 다뤄야 한다.
의료기기 제조기업이 탄소감축 목표를 세우고, 이를 제품 설계와 공급망 관리, 생산공정 개선으로 연결한 뒤, 그 성과를 검증 가능한 데이터로 축적한다면 향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새로운 자금조달 수단을 확보할 가능성이 커진다.
필립스의 첫 EuGB 발행은 의료산업에서 제품의 기술력뿐 아니라 ‘얼마나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사용하는가’가 기업가치와 자금조달 능력을 좌우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