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지속가능성 컨설팅 기업 ERM의 조사 결과, 투자자들이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성과를 평가할 때 외부 ESG 등급보다 자체 조사와 기업과의 직접 소통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SG 등급은 여전히 투자 분석에 활용되고 있지만, 등급 자체에 대한 신뢰와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약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ERM 지속가능성 연구소가 발표한 ‘평가자 평가(Rate the Raters) 2026: 점수를 넘어(Beyond the Score)’ 보고서에 따르면, 투자자들이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있어 ESG 등급을 신뢰하는 정도는 5점 만점에 평균 3.05점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3년 조사 당시 3.31점보다 낮아진 수치다.

ESG 등급, 주요 정보원에서 보조 분석 도구로
이번 조사는 북미와 유럽·중동·아프리카(EMEA), 아시아·태평양, 중남미 지역에서 총 23조5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투자업계 전문가 53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ERM은 2023년 투자자들의 ESG 등급 활용 실태를 조사했으며, 2025년에는 기업을 대상으로 ESG 등급 및 데이터 활용에 관한 별도 조사를 진행했다.
이 결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투자자들이 ESG 등급을 활용하는 방식이 꼽혔다. 기업의 ESG 성과를 평가할 때 유용한 정보원 순위에서 ESG 등급은 2023년 1위에서 2026년 7위로 하락했다.
반면 자체 조사와 기업과의 직접 소통이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으며, 기업의 지속가능성 보고서가 그 뒤를 이었다.
투자자들은 ESG 평가기관이 산출한 최종 점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평가에 활용된 데이터를 자체 분석에 활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평가기관 신뢰도 하락…MSCI는 품질 평가 1위
ESG 등급 및 관련 데이터를 이용하는 가장 큰 목적은 기업의 ESG 성과에 대한 자체 조사를 뒷받침하는 것이었으며, 기업과 지속가능성 성과를 논의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주요 용도로 꼽혔다.
이는 투자자들이 외부 평가기관의 등급을 투자 판단의 직접적인 기준으로 삼기보다, 자체적인 위험 분석과 기업 평가를 위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등급 제공업체의 평가 결과를 참고하되, 개별 기업의 실질적인 성과와 투자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별도로 검증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진 것으로 풀이된다.
ESG 등급의 활용 방식이 변화하면서 평가기관에 대한 투자자들의 검증도 강화되고 있다. 투자자들은 ESG 등급의 평균적인 품질과 유용성, 신뢰도에 대해 2023년보다 낮은 평가를 내렸다.
개별 평가기관의 인지된 품질 순위에서는 MSCI가 2023년 7위에서 2026년 1위로 상승했다. CDP와 EcoVadis, S&P Global이 그 뒤를 이었다. 조사 대상 기관 가운데 품질 점수가 상승한 곳은 MSCI가 유일했다.
응답자 절반 "ESG 등급이 투자 성과에 중요하다"
ESG 평가의 유용성 측면에서도 MSCI와 EcoVadis가 각각 2023년 5위와 7위에서 1위와 2위로 올라섰다. 이는 투자자들이 평가기관 전체에 대한 신뢰를 낮추는 가운데서도 데이터의 활용성이나 특정 분야의 전문성에 따라 공급업체를 차별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투자자들은 평가기관을 선택할 때 단순히 등급의 높고 낮음만 살펴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의 기존 시스템과의 통합 가능성, 가격, 평가 대상과 주제의 범위, 특정 ESG 이슈에 대한 전문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평가기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대됐지만 ESG 등급 자체의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응답자의 51%는 ESG 등급이 투자 성과에 중요한 정보나 데이터를 제공한다고 답했다. 2023년의 57%보다는 낮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의 투자자가 투자 과정에서 ESG 등급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ESG 등급을 기업의 ESG 성과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원으로 평가한 응답자 비율은 오히려 2023년 37%에서 2026년 44%로 상승했다. 등급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도는 낮아졌지만, 상당수 투자자가 여전히 ESG 등급을 유의미한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등급 활용 빈도는 줄고, 투자 성과와의 연관성은 여전
다만 실제 활용 빈도는 감소했다. 응답자의 58%가 ESG 등급과 관련 상품을 주 1회 이상 이용한다고 답했으며, 이 가운데 36%는 주 여러 차례 이용한다고 밝혔다. 주 1회 이상 이용한다는 응답 비율은 2023년 69%에서 11%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응답자의 62%는 지속가능성 정보 공개 의무화가 향후 몇 년 동안 ESG 등급 데이터 활용을 늘릴 것으로 전망했다.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가 확대되면 평가에 필요한 데이터가 늘어나고, 이를 분석·비교하는 과정에서 ESG 등급과 관련 데이터의 활용도 역시 높아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투자자들은 ESG 등급을 개선하기 위한 과제로 관련성과 중요성이 높은 이슈에 대한 집중, 기업의 실제 성과와 등급 간 연계 강화, 평가 방법론의 품질 개선 및 투명한 공개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이는 ESG 등급이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는지, 평가 결과를 투자 판단에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향후 평가기관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점수 경쟁 넘어 평가의 실질적 유용성 높여야
평가 대상과 지표를 무조건 확대하기보다 투자자에게 중요한 사안에 집중하고, 평가 결과의 근거와 산출 과정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다.
ERM 지속가능성 연구소는 "투자자들이 ESG 정보를 평가하고 활용하는 방식이 더욱 정교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평가기관에 대한 감시도 강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ESG 데이터가 기업 연구와 포트폴리오 구성, 위험 관리, 벤치마킹 등 주류 투자 과정에 점차 통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 결과는 ESG 평가시장이 단순한 등급 산출과 순위 경쟁에서 벗어나 데이터의 신뢰성, 분석의 투명성, 투자 의사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도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SG 등급이 투자자에게 여전히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더라도, 평가기관이 제시하는 점수만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판단하는 시대는 점차 약화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