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에너지 분야의 자립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기술주권 패키지(Tech Sovereignty Package)'를 발표했다. 미국 빅테크와 중국 중심의 글로벌 기술 질서에서 벗어나 유럽이 핵심 디지털 인프라를 직접 개발·운영·통제하겠다는 선언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일(현지시간) ▲반도체법 2.0(Chips Act 2.0) ▲클라우드 및 AI 개발법(CADA) ▲EU 오픈소스 전략 ▲에너지 부문 디지털화·AI 전략 로드맵 등 4개 축으로 구성된 기술주권 패키지를 공개했다.
KOTRA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조치는 단순한 산업 육성 정책을 넘어 경제안보 전략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 클라우드 시장의 70% 이상을 미국 기업들이 점유하고 있으며, AI 확산에 따른 반도체·데이터센터 수요 증가가 지정학적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판단이 배경이다.

규제에서 산업정책으로…EU 디지털 전략의 대전환
그동안 EU는 GDPR(개인정보보호규정), AI법(AI Act), 디지털시장법(DMA) 등 규제 중심의 디지털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번 패키지는 방향이 다르다. 반도체 생산, AI 인프라, 클라우드, 오픈소스 생태계, 에너지 시스템까지 직접 육성하는 산업정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특히 반도체법 2.0은 연구개발 중심이었던 기존 정책을 넘어 생산·수요 창출·공급망 복원력 강화로 범위를 확대했다. 스타트업 금융지원, 지역 반도체 클러스터 육성, 공급망 위기 대응 플랫폼 구축 등이 포함됐다.
국내 기업들에 가장 주목되는 분야는 반도체다. EU는 첨단 AI 반도체 등 자체 생산이 어려운 영역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국가'와의 협력을 명시했다.
한국 반도체 업계, 유럽 공급망 재편의 수혜 가능성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첨단 패키징, 소재·장비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공급망 파트너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향후 유럽 내 AI 반도체 생태계 구축 과정에서 협력 기회를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EU가 추진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사업과 공급망 안정화 프로젝트는 한국 장비·소재 기업에도 새로운 시장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AI와 클라우드 분야에서는 새로운 진입장벽이 등장할 전망이다. EU는 향후 5~7년 내 데이터센터 용량을 현재의 3배 수준으로 확대하고, 데이터센터 가속구역(Data Centre Acceleration Zones)을 조성할 계획이다.
데이터 보호 수준 강화...AI·클라우드 기업은 '현지화' 압박
문제는 시장 접근 조건이다. EU는 공공시장 참여 기업에 대해 ▲EU 내 투자·고용 여부 ▲데이터 보호 수준을 핵심 평가기준으로 제시했다.
특히 국방·의료·행정 분야에서는 데이터를 EU 내부에서 처리하고 외부 정부의 접근을 차단하는 수준까지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히 기술력만으로 경쟁하던 시대가 끝나고, "유럽 안에서 얼마나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가 경쟁력이 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국내 AI 기업과 클라우드 사업자들은 앞으로 유럽 시장 진출 시 현지 데이터센터 구축, 현지 법인 확대, 데이터 주권 대응 전략을 동시에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픈소스 전략, 미국 빅테크 견제 본격화
EU 오픈소스 전략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EU는 클라우드, AI, 인터넷 기술, 사이버보안, 반도체 분야에서 유럽형 오픈소스 생태계를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Open Internet Stack' 플랫폼을 구축해 미국 빅테크 솔루션을 대체할 수 있는 유럽산 소프트웨어를 확산할 계획이다. 이는 사실상 미국 중심 디지털 플랫폼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중장기 전략으로 해석된다.
한국 소프트웨어 기업 입장에서는 EU가 요구하는 개방성·상호운용성·데이터 통제 기준을 충족할 경우 새로운 협력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폐쇄적 플랫폼 구조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번 기술주권 패키지는 한국 정부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기술 경쟁이 산업 경쟁을 넘어 경제안보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EU는 반도체와 AI를 더 이상 단순 산업정책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안보와 공급망 안정성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한 시대"...정부, 기업 대응 중요
둘째, AI 인프라 정책과 에너지 정책을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EU는 데이터센터 확대와 동시에 전력망 디지털화, 스마트그리드, 재생에너지 연계를 추진하고 있다.
셋째, '데이터 주권'이 새로운 무역 규범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기술 성능뿐 아니라 데이터 보관 위치, 소유권, 통제권이 핵심 경쟁 요소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EU 기술주권 패키지는 아직 입법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반도체법 2.0과 클라우드·AI 개발법은 유럽의회와 EU 이사회 심의를 거쳐야 하며, 세부 내용도 변경될 수 있다. 그러나 방향성은 분명하다. 유럽은 이제 "어디서 만든 기술인가"보다 "누가 통제하고 운영하는 기술인가"를 묻고 있다.
한국 기업들 역시 유럽 시장을 공략하려면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현지 투자, 데이터 보호, 공급망 신뢰성, 지속가능성까지 포함한 새로운 경쟁 전략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KOTRA 역시 "EU 현지 투자와 데이터 보호 체계를 시장 진입 전략에 사전에 반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