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글로벌 넷제로 전환의 엔진이 돼야 한다”
도시는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 전략의 교차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저소득·중간소득 국가(LMICs, Low- and Middle-Income Countries)의 도시 탈탄소화는 더 이상 ‘선택적 환경정책’이 아니라, 미래 산업을 좌우하는 핵심 개발전략으로 자리잡았다. 2050년이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살게 되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 도시를 설계·운영하느냐가 기후·산업·고용 구조를 동시에 규정하게 된다.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 United Nations Industrial Development Organization)가 최근 발간한 ‘변화하는 세계에서 글로벌 탄소중립 전환의 동력으로서의 도시(The City–Industry–Climate Nexus)’ 보고서는 미래 탄소중립 환경에서 도시의 역할에 주목했다.
보고서는 “새로운 청정 산업과 경제적 회복탄력성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은 도시는 폭염·폭풍·해수면 상승 등 기후위험이 커지고, 도시 확장과 인구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에너지·토지·폐기물 시스템 전반에 막대한 부담이 쌓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시 전환이 곧 산업 구조 재편…성장과 불평등 과제 풀 열쇠
시멘트·철강·섬유·식품·물류·폐기물 관리 등 이른바 ‘감축이 어려운(hard-to-abate)’ 부문이 도시 생활의 핵심 인프라와 얽혀 있는 만큼, 도시 전환 자체가 곧 산업 구조 전환과 직결된다.
이는 앞으로 도시에 새로운 청정 산업을 끌어들이고, 기후위기에 견딜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는 인구·인프라·기업이 밀집된 공간이자, 새로운 산업이 등장하고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에 도시 탈탄소화가 곧 ‘다음 세대 산업화 전략’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도시 탈탄소화를 '산업정책의 다음 단계'로 규정하고, 도시에 집중된 생산·소비·인프라를 저탄소 방식으로 재구성하면, 재생에너지, 친환경 건축자재, 전기차 및 대중교통, 순환경제·재사용·재활용 산업 등 새로운 시장이 동시에 열리고, 양질의 일자리도 함께 창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성장과 배출을 ‘탈동조화(decoupling)’하는 가장 현실적 경로가 도시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대 도시는 GDP 성장과 혁신의 거점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화하는 불평등과 비공식 정착지 확대, 불안정 노동 등 구조적 취약성이 존재한다. 경제 성장이 더딘 국가의 도시는 경우 토지 황폐화, 취약한 식량·물 시스템, 탄소 집약적 공급망 의존이 맞물리며 사회·경제적 리스크가 증폭되고 있다.
불평등·비공식 정착지·MSME…도시 경제의 그늘 짙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탄소중립'을 핵심 정책 어젠다를 삼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시 고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중소·영세기업(MSME)과 로컬 스타트업이다.
이들은 지역의 문제(에너지 효율, 폐기물, 물 관리, 대중교통 등)에 맞춘 ‘현장형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핵심 주체지만, 자금 접근성 부족-R&D·기술 지원의 부재-정책·규제 정보에 대한 접근 격차로 인해 성장과 확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고서는 “도시의 기후해법은 현지 기업에서 나오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혁신·창업 생태계가 아직 미성숙한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더 나아가 ‘그린 스킬(green skills)’ 격차도 탄소중립 도시의 미래 방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부상하는 그린 산업이 요구하는 역량과 실제 직업훈련·교육 시스템 사이의 간극이 커, 청년·여성 노동자들이 새로운 일자리에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도시 그린 전환의 열쇠는 재정·공공조달에서 시작된다
보고서는 우선 도시 재정·금융 시스템의 강화를 난관을 풀어갈 동력으로 봤다. 많은 LMIC 도시들이 낮은 신용도, 복잡한 기후금융 진입 요건, 사업성 있는 프로젝트 부족 등으로 자본시장·기후금융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보조금 의존에서 벗어나 신용 기반 인프라 투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시 재정 건전성 강화-자산관리·중장기 투자계획 수립-산업단지·경제특구 등 ‘장소 기반(value proposition)’ 프로젝트 발굴, 기후 스마트 인프라에 대한 은행·투자가가 신뢰할 수 있는 ‘은행대출 가능 프로젝트(bankable project)’ 설계 등이 관건이다.
또 지방정부가 보유한 자본 투자계획·도시 설계 규제·공공조달 권한을 활용해 시장을 ‘녹색 전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린 빌딩 기준·도시 설계 규정 강화, 저탄소 자재·서비스를 우대하는 공공조달(GPP) 확대, 대중교통·보행 중심 교통 인프라 투자를 통해 민간 투자의 방향까지 함께 바꾸는 식이다.

혁신 생태계·기술이전·그린 스킬 등 프로그램 확대 필요
이어 혁신 생태계와 인력 양성으로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 보고서는 도시가 기후·산업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스타트업·MSME를 지원하는 클린테크 액셀러레이터를 운영하며, 대학·연구기관·민간기업·투자자를 연결하는 혁신 허브를 조성할 때 도시 맞춤형 저탄소 솔루션이 빠르게 개발·확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선진 기술을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화된 기술이전 파트너십을 통해 현지 상황에 맞게 ‘번역·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현지 엔지니어·기술자의 역량 강화, 공동 R&D 프로그램, 도시 간·국가 간 ‘학습 네트워크’를 통한 경험 공유가 필요하다.
보고서는 그린 스킬 개발을 도시 전환의 핵심 조건으로 꼽았다. 직업훈련 교육과정을 최신 청정산업 수요에 맞게 개편하고, 청년과 여성에게 우선 기회를 제공하며, 산업계와 연계된 현장 실습·인턴십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를 단순한 집행 단위가 아닌 경제 주체로 격상해
이는 도시 탈탄소화가 특정 기업만의 ‘친환경 마케팅’이 아니라, 지역 주민 다수가 참여하는 포용적 전환이 되기 위한 기반이라는 의미다. 도시를 단순히 국가 정책을 전달·집행하는 행정 단위가 아니라, 산업·기후 전략을 공동으로 설계하는 ‘경제 주체’로서 그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정부(국가)·도시(지자체)·민간·국제기구가 함께 도시 탈탄소화에 투자할 때, 넷제로 전환과 포용적 성장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정부의 산업·기후 전략과 지방정부의 도시계획, 민간의 투자와 혁신, 국제기구의 기술·금융 지원이 도시 단위에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시를 성장의 엔진을 넘어, 지속가능한 산업화의 설계도(blueprint)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도시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재정·기술·인력을 결합해 나갈 것인지가 앞으로의 기후 리더십 경쟁을 좌우할 것이다. 그 출발선은 기후위기와 산업 전환의 최전선이 국가가 아니라 도시라는 인식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