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기업의 기후 정보 공시 규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EU의 CSRD(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 본격화에 이어, 미국 최대 경제권인 캘리포니아가 온실가스(GHG) 배출과 기후 관련 재무위험 공시를 의무화하는 강력한 규제를 추진하면서 글로벌 공급망 전체가 규제의 영향권에 들어섰다.
캘리포니아 대기자원위원회(CARB)는 최근 개최한 공개 워크숍에서 ‘기업 온실가스 보고 및 기후위험 공시 프로그램(SB 253·SB 261·SB 219)'의 주요 일정과 규제 방향을 확정 단계로 제시했다.
2026년 시행을 앞둔 이번 제도는 '미국판 CSRD', 혹은 글로벌 기후공시 기준의 사실상 표준화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미국 시장과 공급망에 연계된 한국기업은 규모를 불문하고 직·간접 공시 부담이 불가피하다.

스코프3까지 공개…‘재무 리스크 관리’ 초점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공격적인 기후 정책을 추진해온 지역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기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탄소중립 목표(2045년)를 법제화한 최초의 주이기도 하다. 이번 SB 253·SB 261 법안은 이러한 기조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했다.
CARB는 규제의 목적을 “기업 활동의 기후 리스크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금융·산업 전반의 시스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두고 있다. 즉, 환경 규제라기보다 재무·투자 안정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설명이다.
특히 기후 리스크를 공시하도록 하는 SB 261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공시 규제 논의와 맞물리며, 향후 연방 단위 확산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번 규제의 가장 큰 변화는 배출 데이터의 범위다. SB 253은 2027년부터 스코프3(Scope 3) 배출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규정했다. 스코프3는 기업의 직접·간접 배출(Scope 1·2)을 넘어 부품 구매, 물류, 고객 사용 단계, 폐기, 직원 출장 등 기업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포함한다.
대상 기업의 ‘진짜 사업 실체’ 기준 가려낸다
이는 기업 단일 조직의 통제를 넘어 공급망 전체의 탄소까지 책임지는 시대를 의미한다. 이미 글로벌 OEM은 배출정보 제출을 구매평가 요소로 편입하고 있으며, CARB의 규제 시행은 미국 기업이 이를 공식적으로 요구할 법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한국 기업들은 직접 규제 대상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완성차·IT·유통 기업들이 스코프3 산정을 위해 한국 협력사에 데이터를 요구하는 상황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CARB는 이번 워크숍에서 규제 대상 기업을 판단하는 기준도 명확히 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실질적 경제 활동 여부, 그리고 연 매출 기준(10억 달러 이상·5억 달러 이상)이 핵심이다.
특징적인 대목은 기업이 캘리포니아에서 수행하는 활동이 원격근무 직원만으로 구성된 경우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부분이다. CARB는 이러한 예외 조항을 통해 '형식적 진출'이 아닌 '경제적 연계 실체를 기준으로 규제를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자동차·배터리·반도체 등 한국 핵심산업 직격탄
다만 CARB는 현재 기업 식별에 활용되는 기존 데이터베이스가 불완전하다고 지적하며, 향후 캘리포니아 세무당국(FTB)의 신고자료를 활용해 대상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경우 미국 현지 법인을 보유한 한국 기업의 상당수가 본 규제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공시 의무화와 함께 새로운 비용 부담도 발생한다. CARB는 공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기업에 연간 수수료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5~10억 달러 기업은 SB 261 수수료만 납부하지만, 10억 달러 이상 기업은 SB 253과 SB 261 두 가지 수수료를 모두 부담해야 한다.
이는 기후공시가 단순 행정규제가 아니라 기업 비용구조의 변화를 의미한다. 향후 기업 평가의 비용요인(cost driver)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 기업에게 이번 규제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동차·배터리·반도체·철강 등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산업일수록 직접적인 공시·데이터 제출 의무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협력사까지 데이터 압박 등 규제 대상으로
특히 현대차·기아·삼성전자·LG에너지솔루션 등은 캘리포니아 경제권을 기반으로 활발한 생산·판매 활동을 하고 있어 규제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더 큰 문제는 스코프3이다. 미국 기업이 의무적으로 스코프3을 산정해야 한다면, 한국 협력사들은 자연스럽게 데이터 제공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아직 국가 단위의 배출 데이터 플랫폼이나 표준 규정이 미완성 상태다. EU CSRD까지 동시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의 데이터 경쟁력 부재가 향후 공급망 탈락 요인으로 작용할 위험도 있다.
CARB는 시행 첫해만큼은 유연성을 부여한다. 2026년 스코프1·2 보고에는 데이터 검증(Assurance)을 요구하지 않고,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은 기업에는 보고 의무도 면제된다.
준비냐 후퇴냐, 기후 투명성이 시장 진입 조건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초기 적응 기간이다. CARB는 향후 정기 검증 의무화, 보고 범위 확대, 벌칙 강화를 예고했다. 규제는 분명히 점진적이지만 일관성을 띠고 있다. 탄소정보의 투명성 요구는 높아지기만 할 뿐, 낮아질 가능성은 없다. 전문가들은 “이제 기후 데이터는 글로벌 시장 진입의 최소 요건이 됐다”고 강조한다.
한국 기업의 과제도 만만찮다. 먼저 배출량 데이터 관리 체계 고도화를 서둘러야 한다. 생산공정뿐 아니라 물류·부품 조달·사용단계까지 배출량을 정밀하게 산정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또 공급망(Scope 3) 관리 체계 구축도 정비해야 한다. 협력사에 대한 배출 데이터 요청, 배출계수 제공,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기후 리스크의 재무적 영향 분석도 보완해야 한다. TCFD, IFRS S2에 따른 공시 체계는 앞으로 재무보고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는 국가 단위의 배출 데이터 플랫폼 구축과 중소기업 지원 체계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에는 규제의 범위와 깊이가 매우 방대하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이번 조치는 '기후 투명성'이 산업 경쟁력·무역 경쟁력·재무 안정성의 핵심 기준으로 이동했음을 재확인시켜 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준비할 것인가, 뒤처질 것인가”를 가르는 결정적 분기점이 눈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