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 RE100, 탄소중립. 미래 산업을 움직이는 공통 분모는 전력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전력 생산 부족이 아니다. 생산된 전기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 못하는 '전력망 병목'이 국가 경쟁력을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에너지 고속도로와 전력망 대전환」 보고서는 전기의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소가 발전량이 아니라 전력 이동 능력이라고 분석했다.
전기를 얼마나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멀리, 안정적으로, 적시에 전달할 수 있느냐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발전소는 지방에, 전력 수요는 수도권에
한국 전력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발전지와 수요지의 불일치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대규모 발전설비는 동해안과 서해안, 호남권 등 지방에 집중돼 있다. 반면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업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실제 서울의 전력 자급률은 7% 수준에 불과한 반면, 강원과 충남은 150%를 넘는다. 전국 전력 판매량의 40% 이상이 수도권에서 소비되고 있지만 전력 생산은 수도권 밖에서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송전망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10여 년간 국내 최대전력 수요는 약 98% 증가했고 발전설비는 154% 늘었지만 송전설비 확충은 26% 증가에 그쳤다. 발전소는 늘었지만 전기를 실어 나를 '길'은 충분히 늘어나지 않은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해안이다. 동해안 지역에는 약 18GW 규모의 발전설비가 집중돼 있지만 실제 송전 용량은 11GW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약 7GW 규모의 전력이 병목에 갇혀 이동하지 못하는 구조다.
전력의 양보다 24시간 고품질이 중요해졌다
AI 확산은 전력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생성형 AI와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과거 제조업과 달리 24시간 끊김 없는 고품질 전력을 요구한다.
순간적인 전압 변동이나 공급 불안정도 시스템 운영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전력 정책의 초점도 발전량 확대에서 계통 안정성과 송전 능력 확보로 이동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용인·평택 반도체 특화단지는 향후 10GW 이상의 전력을 필요로 할 것으로 전망된다. 단일 산업 거점으로는 이례적인 규모다.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의 해법으로 고전압직류송전(HVDC) 기반의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을 제시했다.
해법은 HVDC 기반 '에너지 고속도로'
HVDC는 기존 교류(AC) 송전 방식보다 장거리·대용량 송전에 유리하다. 특히 해저나 지중 구간에서 손실이 적고 전력 흐름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어 재생에너지 확대와 수도권 수요 집중 문제를 해결할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정부 구상에 따르면 서남권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연결하는 620km 규모의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가 첫 단계다. 이후 서해안·남해안·동해안을 연결하는 U자형 전국 전력망으로 확대해 국가 전력 지도를 재편한다는 계획이다.
에너지 고속도로의 핵심은 단순히 송전선을 더 까는 것이 아니다. 장거리 전력 수송(HVDC),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통한 계통 안정화, 지역별 전력 수급을 반영한 시장 제도 개편을 동시에 추진하는 국가 인프라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전력망 확충 사업은 주민 반대와 인허가 지연으로 수년씩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동해안-수도권 송전 사업은 66개월, 북당진-신탕정 사업은 150개월 지연됐다.

기술보다 어려운 것은 '실행'
보고서는 전력망 갈등의 본질이 공사비가 아니라 '신뢰 비용'이라고 지적한다. 주민 수용성 확보와 지역 상생 구조 없이는 어떤 송전망도 완성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일과 영국, 캐나다 등은 보상금 지급을 넘어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 창출, 지역기금 조성 등을 결합한 방식으로 갈등을 완화하고 있다. 보고서는 전력망을 더 이상 발전소를 뒷받침하는 보조 인프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공장이 들어서면 전기를 공급했지만, 이제는 전력망이 구축된 곳으로 산업이 이동하는 시대가 됐다.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은 발전소 숫자가 아니라 전력 이동 능력에서 결정된다는 의미다.
삼일PwC는 "전력망 대전환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실행 체계"라며 "HVDC 인프라, 시장 제도, 주민 수용성, 재원 조달을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에너지 고속도로가 국가 성장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