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지속가능성 규제 대폭 완화…CSRD·CSDDD ‘슈퍼대기업 중심’으로 후퇴
EU, 지속가능성 규제 대폭 완화…CSRD·CSDDD ‘슈퍼대기업 중심’으로 후퇴
유럽연합(EU)이 기업 지속가능성 규제의 양대 축인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과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CS3D)의 적용 범위와 의무를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규제의 초점이 ‘일반 대기업’에서 ‘극소수 초대형 기업’으로 옮겨가면서, 한국 기업에 대한 직접 규제 부담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공급망·투자자 요구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Governance&Policy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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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기업 지속가능성 규제의 양대 축인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과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CS3D)의 적용 범위와 의무를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규제의 초점이 ‘일반 대기업’에서 ‘극소수 초대형 기업’으로 옮겨가면서, 한국 기업에 대한 직접 규제 부담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공급망·투자자 요구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유럽의회는 최근 본회의에서 기업 규제 간소화를 골자로 한 이른바 ‘옴니버스(Omnibus) 개정안’에 대해 찬성 382표, 반대 249표, 기권 13표로 협상 입장을 채택했다. 이 입장을 토대로 유럽의회는 11월 18일부터 EU 회원국 정부, 유럽집행위원회와 3자 협상(트릴로그)에 들어가며, 최종 법안 확정 목표 시점은 2025년 말이다.

CSRD 기준 제정 구조와 ESRS Set. 자료 출처: 삼일회계법인 EU CSRD, 2023년 1월. 이미지 출처: GS칼텍스 홈페이지 캡처. 

CSRD, 매출 4억5,000만 유로 이상으로 ‘대상 축소’

먼저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은 적용 대상 기업과 보고 의무가 크게 줄어드는 방향으로 조정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CSRD 적용 대상은 직원 1,750명 이상, 연 매출 4억5,000만 유로 이상 등 두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기업으로 한정된다.

기존에는 직원 250명 이상 등 비교적 넓은 범위의 대기업과 상장사가 보고 대상이었지만, 문턱이 크게 높아지면서 규제 대상 기업 수는 상당 폭 감소할 것으로 관측된다.

보고 내용도 간소화된다. ESRS(유럽 지속가능성 보고기준)를 단순화·축소하고, 정성적(질적) 설명 요구 수준을 완화했으며, 업종별(섹터별) 추가 공시는 의무가 아닌 자발적 선택 사항으로 바뀐다.

공급망 상 중소기업에 대한 고려도 강화됐다. 개정안은 CSRD 대상 대기업이 중소기업(SME) 등 가치사슬상 파트너에게 ‘자발적 기준’을 넘어서는 과도한 데이터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또 제3국에서 현지 법령 등으로 인해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 국가·섹터별 평균값을 활용해 보고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CSDDD, ‘초대형 기업’만…기후전환 계획 의무 삭제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 역시 적용 범위와 의무가 대폭 완화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CSDDD는 EU 역내 기업은 직원 5,000명 이상, 전 세계 매출 15억 유로 이상이며, 비EU 기업은 EU 역내 매출 15억 유로 이상으로 선을 그었다. 사실상 소수의 글로벌 초대형 기업만 규제 대상이 되는 셈이다.

실사 요건도 완화됐다. 파리기후협정에 부합하는 전환 계획 수립 의무가 삭제됐고, 기업은 사업·자회사·가치사슬 전반에 대해 ‘위험 기반(risk-based) 접근’만 충실히 이행하면 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소규모 공급망 파트너에 대한 자료 요구는 ‘최후의 수단’으로 제한된다. 실사 수행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목적에 비례하고 대상이 좁혀진 방식으로만 정보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제재 체계는 회원국 중심으로 재정비된다. 규정 위반 시 책임 소재와 제재는 EU 차원이 아닌 각 회원국이 부과하며, 피해자에 대해서는 ‘완전한 손해배상(full compensation)’ 원칙을 명시했다. 회원국이 EU 기준을 초과하는 이른바 ‘골드 플래이팅(gold-plating)’ 규제를 도입하지 못하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기존 CSRD 공시 항목의 기본 구성. 이미지 출처: pwc

“EU 그린딜에 역행” vs “기업 경쟁력·행정 부담 완화”

이와 함께 유럽집행위는 기업이 한 곳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보고 양식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디지털 포털(원스톱 창구)을 구축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번 조치는 EU가 지난 수년간 추진해온 그린딜·ESG 규제 체계의 ‘실질 후퇴’라는 평가와, 글로벌 경쟁 심화 속에서 기업의 규제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완화론이 충돌한 결과로 해석된다.

지속가능 투자 단체와 시민사회는 “CSRD와 CSDDD의 적용 범위를 급격히 좁히면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EU가 기후·인권·환경 분야에서 선도해온 국제적 위상도 흔들릴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반면 기업계와 일부 정치권은 “복잡한 보고·실사 의무가 과도한 행정비용과 경쟁력 저하를 초래해왔으며, 위험이 크고 영향력이 큰 기업에 규제를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최종 규제 강도는 앞으로 진행될 유럽의회–이사회–집행위 3자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다. 현 시점에서는 의회안에 비해 덜 완화된 이사회 입장과의 절충이 어느 수준에서 이뤄질지가 관건이다.

한국기업 직접 부담은 제한적...공급망·투자자 요구는 계속

이번 개정 방향이 확정될 경우, 직접적으로 CSRD·CSDDD의 적용을 받는 한국 기업은 소수 초대형 그룹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CSDDD 기준상 EU 역내 매출 15억 유로 이상을 올리는 국내 기업은 극히 제한적이며, CSRD 기준(직원 1,750명·매출 4억5,000만 유로 이상)을 충족하는 유럽 현지 법인도 일부 대기업 위주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의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EU 산림벌채 규제(EUDR), 강제노동 금지 규정,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다른 환경·인권 규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유럽 연기금·글로벌 자산운용사·국제 금융기관은 이미 TCFD·ISSB 등 국제 기준에 따른 ESG 정보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대기업과 거래하는 한국 중소·중견기업은 CSRD·CSDDD 완화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의 공급망 데이터 제공 요구에 계속 대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개정안이 “과도한 데이터 요구 금지”와 “위험 기반 접근”을 명시한 만큼, 무차별적인 자료 요구보다는 표준화된 템플릿과 고위험 영역 중심의 정보 요청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EU 지속가능성 규제 간소화 현황. 이미지 출처: pwc

‘최소 법적 준수’ 넘어 지속가능 경영 체계 유지·고도화 관건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지금부터 다음과 같은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단 유럽 현지 법인과 그룹 차원에서 ▲직원 수 ▲EU 및 전 세계 매출 규모를 기준으로 CSRD·CSDDD 적용 가능성을 점검해야 한다.

동시에 주요 고객사(완성차·전자·패션·유럽 OEM 등)가 규제 대상인지, 이들과의 계약·행동강령(Code of Conduct)에 ESG 관련 조항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규제 완화만을 이유로 기존 ESG 공시·온실가스 인벤토리·인권·환경 실사 시스템을 축소할 경우, 글로벌 투자자와 고객사 평가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CSRD, ISSB, TCFD 등 다양한 기준을 상호 연계해 중복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방식의 재정비가 요구된다.

또 모든 협력업체를 동일한 수준으로 점검하는 ‘형식적 실사’에서 벗어나, 고위험 국가·산업, 취약 노동, 환경파괴 위험이 큰 공정 등을 선별해 자원과 역량을 집중하는 구조로 재설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등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 유지가 중요하다.

위험 기반 실사로 내실화...“정보 허브·표준 템플릿 필요”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조정 역할도 강조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를 비롯 산업부·금융위·외교부 등 관계 부처가 협력해 EU 옴니버스 패키지, CSRD·CSDDD, EUDR, 강제노동 규정 등 변화하는 규제 환경을 통합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업종·규모별 맞춤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상설 플랫폼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EU 집행위가 구축할 디지털 포털의 템플릿·가이드를 신속히 분석해 한국 기업 실정에 맞는 한국어 표준 양식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특히 중소기업의 행정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국내 관련 입법과의 정합성 확보도 신속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국내에서도 기업 인권·환경 실사 관련 법제 논의가 이어지는 만큼, EU의 방향성과 충돌하지 않도록 기본 원칙과 위험 기반 접근, 공급망 책임 범위 등을 조율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를 단순한 “규제 후퇴”가 아니라 지속가능성 규칙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으로 보고, 한국 기업과 정부가 이를 계기로 보다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ESG·지속가능 경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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