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자동차·에너지 산업의 온실가스(GHG) 배출을 규제해 온 법적 근거를 폐지하기로 했다. 2009년 도입된 이른바 ‘온실가스 위험성 평가(endangerment finding)’를 철회함으로써, 연방 차원의 기후 규제 체계를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의도다.
EPA는 13일(현지시간) 해당 위험성 평가를 폐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 젤딘 EPA 청장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번 결정을 “역대 최대 규모의 규제 완화 조치”라고 평가했다.
문제의 위험성 평가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09년 발표됐다. EPA는 당시 보고서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지구 온난화와 극단적 기상현상, 열 관련 사망 증가, 대기질 악화 등을 통해 공중 보건과 복지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오바마 정부 시절 도입…“과학적 근거 취약” 전면 재검토
이 평가는 이후 자동차와 발전·석유·가스 부문 등 주요 산업에 대한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설정하는 법적 토대가 됐다. EPA는 2010년 경량 차량, 2011년 중·대형 차량에 대한 첫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도입했으며, 발전소와 화석연료 산업에 대해서도 규제를 확대해 왔다.
그러나 EPA는 2025년 7월 “위험성 판정의 과학적 근거 중 상당 부분이 예상보다 취약하다는 우려가 있다”며 철회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구 온난화 예측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점도 재검토 사유로 제시됐다.
EPA는 위험성 판정이 철회되면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제정할 법적 권한 자체도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경량·중형·대형 차량 및 대형 엔진에 적용되던 연방 온실가스 배출 기준도 함께 폐지된다.
EPA는 관련 규제가 사라질 경우 자동차 산업에서만 1조3천억 달러 이상의 비용 절감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연방 차원의 온실가스 측정·보고·인증·준수 의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파리협정 탈퇴 이어 기후 정책 전면 후퇴...환경단체 반발
젤딘 청장은 “위험성 판정은 16년간 소비자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미국인에게 수조 달러의 숨은 비용을 초래했다”며 “일부가 ‘기후변화 종교의 성배’라고 부르던 이 판정은 이제 폐지됐다”고 주장했다.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 들어 추진해 온 기후 규제 완화 기조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취임 첫날 행정명령을 통해 파리 협정에서 재탈퇴를 선언했으며, 연방 청정에너지 지원금 수십억 달러를 취소하고 주요 해상풍력 프로젝트 중단을 시도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유엔 연설에서 기후변화를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사기극”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환경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프레드 크루프 '환경보호기금(Environmental Defense Fund)' 회장은 “EPA의 정치적 지도부가 1년간 추진해 온 이번 조치는 기후 오염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압도적 증거를 무시한 것”이라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전력·에너지 시장 전반에 걸쳐 규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연방정부의 기후 대응 체계가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보호주의 정책 강화 가능성에 한국 산업 ‘이중 압박’ 현실화
미국은 세계 2위의 온실가스 배출국이자 파리협정의 서명국으로서, 연방 차원의 기후 규제 해체는 다른 국가들의 기후 목표 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연합, 영국,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들이 탄소감축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이번 결정은 국제 협력의 약화와 글로벌 탄소감축 목표의 지연을 초래할 수 있다.
일부 국가들은 미국의 규제 완화에 대응하여 자국 기업의 탄소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탄소국경조정세(CBAM) 등의 보호주의 정책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재생에너지 산업은 단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기후변화의 심화로 인한 에너지 안보 우려와 재생에너지의 경제성 개선으로 인해 글로벌 재생에너지 확산이 가속화될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이중의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될 전망이다.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주요 수출산업에서 미국 기업들이 환경규제 부담을 덜게 되면, 한국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국내 탄소규제와 EU의 탄소국경세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이는 한국 제조업의 국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한국 정부가 미국과는 다른 강화된 환경 기준을 유지한다면, 환경친화적 기술과 청정에너지 산업에서의 차별화 전략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미국 시장 진입 시 규제 혼란으로 인한 비용 증가와 기술 표준의 불일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한국 정부는 양자 협상을 통해 규제 조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