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국가가 다시 철강의 방향 못 박았다”
11월 27일 국회를 통과한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 이른바 K-스틸법은 정부가 철강산업의 미래를 ‘저탄소 전환’으로 공식 선언한 첫 법률이다.
이 법률에 따르면 국무총리 산하 철강산업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설치, 저탄소철강 특구 조성, 저탄소철강기술 선정과 지원, 저탄소철강 인증제 도입 등을 담겼다.
사단법인 넥스트는 최근 발간한 이슈 브리프 '한국형 저탄소철강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 K-스틸법이 정해야 할 저탄소철강기술 경로'에서 조속한 ‘한국형 저탄소철강’ 기준 마련을 촉구했다.

커지는 글로벌 수요… 공급은 스웨덴 두 기업뿐
보고서는 "포항제철 설립 이후 50년 만에 정부가 철강산업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고, 탈탄소 전환을 법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면서도 “어떤 제품을 저탄소철강으로 인정하고, 어떤 공정을 저탄소철강기술로 볼지에 따라 산업의 향방이 갈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준이 모호하면 시장 혼선과 예산 낭비를 부르고, 반대로 지나치게 높은 기준은 기업이 전환 투자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철강업의 높은 수출 비중을 고려할 때 “글로벌 수요기업이 수용할 수준”과 “국내 기술·비용 구조로 현실적으로 달성 가능한 수준”을 동시에 만족하는 ‘한국형 저탄소철강’ 정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세계경제포럼(WEF)과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퍼스트무버연합(First Movers Coalition)’에 참여한 글로벌 수요 기업들은 2030년까지 전체 철강 조달량의 10%를 ‘니어 제로(near-zero) 철강’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또 다른 수요 연합인 ‘스틸제로(SteelZero)’ 회원사들은 같은 시기까지 구매 철강의 절반을 저탄소철강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현재 저탄소철강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 철강기업의 공정으론 저탄소 시장 진입 불가
보고서는 두 이니셔티브의 참여 기업들이 실제로 구매하겠다고 약속한 물량만 보수적으로 잡아도 연간 600만~700만t을 크게 웃돌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2030년 이전 상업 생산을 예고한 공급 측 주체는 스웨덴 스테그라(Stegra)와 사브(SSAB) 두 곳뿐으로, 양사의 계획 생산량을 모두 합쳐도 연 500만t 수준에 그친다. 볼보·벤츠·마이크로소프트·이케아·포르쉐 등이 이미 장기 구매계약 또는 구매의향서를 체결한 만큼, 2026~2028년 실물 공급이 시작되면 “숨은 수요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구조”라는 분석이다.
즉, 저탄소철강은 먼 미래의 실험 시장이 아니라 곧 실체가 형성될 '필수 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 시장의 핵심 수요처가 북미·유럽의 자동차, 조선, 재생에너지 설비 기업이라는 점에서 한국 철강 수출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국내 철강업계의 주력 공정인 고로-전로(BF-BOF)는 국제 기준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점이 문제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BF-BOF 공정의 평균 탄소배출량(조강 기준, Scope 1+2)은 t당 약 2.1tCO₂ 수준이다. 반면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제시한 ‘니어 제로 철강’ 기준은 스크랩 투입 비율에 따라 t당 0.05~0.4tCO₂, 민간 인증기구 리스폰서블스틸(ResponsibleSteel)과 스틸제로가 요구하는 범위도 이 안에서 설정된다.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상위 10% 수준의 배출 강도를 벤치마크로 삼아 이를 초과하는 배출량에 국경세를 부과한다. 캘리포니아주의 ‘바이 클린 캘리포니아’ 정책은 강재 종류별 평균 탄소집약도보다 배출량이 많으면 공공 프로젝트 입찰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고서는 “현재 공정으로는 한국의 고급강이 저탄소철강 시장에 진입할 수 없고, 향후 수출시장에서도 점차 배제될 위험이 크다”고 평가했다.
현실적인 기술 세 가지… “단일 기술 전략으론 위험”
2030년까지 국내에서 상업 생산이 가능하고 국제 기준을 일정 부분 충족할 수 있는 공정으로는 ▲고로–전기로 복합공정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 ‘하이렉스(HyREX)’ ▲DRI 기반 전기로 공정(DRI–EAF)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현대제철과 포스코가 추진 중인 고로–전기로 복합공정은 기존 설비를 활용하면서 배출량을 줄이는 방식이다. 1단계(전기로에서 만든 용강을 전로에 투입)는 t당 약 1.8tCO₂까지 줄이지만 EU·민간 이니셔티브 기준에는 크게 못 미친다. 2단계(고로에서 생산한 용선을 전기로에 투입)는 1.4tCO₂ 수준까지 낮출 수 있어 일부 기준에 근접하지만, 원료·운송 등 업스트림 배출까지 고려하면 여전히 미달할 가능성이 있다.
하이렉스는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직접환원철(DRI)을 만들고 이를 전기용융로에서 스크랩과 함께 제강하는 방식이다. 보고서는 "원전 전력을 이용한 수전해로 청정수소를 공급하고, 국내 전력은 재생에너지 PPA로 조달한다는 가정 아래 2030년 생산 시 t당 약 0.26tCO₂(업스트림 포함, 스크랩 20%)까지 줄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퍼스트무버연합이 요구하는 ‘니어 제로’ 기준을 충족하는 수준이다. 다만 청정수소 수요가 막대하고, 균등화철강생산비용(LCOS)이 DRI-EAF 대비 50% 이상 높아 비용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약점이다.
DRI–EAF 공정은 해외에서 생산된 가스 기반 DRI를 수입해 스크랩(30%)과 함께 전기로에서 용융·정련하는 모델이다. 보고서는 "이 경우 직접·간접배출(Scope 1+2)은 t당 0.16tCO₂, 원료 단계까지 포함한 업스트림 배출을 합쳐도 약 0.64tCO₂ 수준일 것"으로 전망했다. 퍼스트무버연합의 ‘니어 제로’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스틸제로 등 대부분의 국제 저탄소철강 조달 기준을 안정적으로 충족할 수 있는 수준이다. LCOS도 t당 698달러로, 하이렉스(1,052달러)보다 비용 부담이 훨씬 적은 것으로 제시됐다.

K-스틸법, K-GX와 연동해 전력·수소 인프라까지 함께 설계해야
따라서 ‘하이렉스=국가대표 기술’로 쏠리는 현재 국내의 기류는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는 "단일 기술에 산업의 미래를 걸기에는 기술·경제적 불확실성이 크다”며 “DRI–EAF를 포함한 복수의 저탄소철강기술 포트폴리오를 전제로 K-스틸법을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이미 상용화된 가스 DRI를 활용하면 전기로만 확충해도 비교적 빠르게 생산 규모를 키울 수 있어, 한국 철강사의 저탄소철강 시장 진입 시점을 앞당길 수 있는 ‘중단기 핵심 축’으로 평가했다.
K-스틸법의 핵심 역할은 “국내 철강사가 저탄소철강 시장에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도록 명확한 기술 방향과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무엇을 저탄소철강으로 인증하고, 어떤 공정을 저탄소철강기술로 지원할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야 기업이 “내일이 불투명한 설비에 투자했다가 좌초자산을 떠안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정부는 내년 상반기 ‘대한민국 녹색전환(K-GX) 종합계획’을 발표할 예정인데 이 부분과의 정합성도 필요하다. 태양광·풍력·전력망·ESS·전기차·배터리 등과 함께 저탄소철강을 국가 녹색전환 전략의 한 축으로 포함하고, 전력망·수소 유통망, DRI 공급망 등 인프라 투자를 연계해 설계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보고서는 “이상기후와 기후재난이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산업 활동의 방향이 저탄소로 역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지금 K-스틸법이 어떤 기준과 기술 경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국 철강산업이 ‘저탄소 선도국’으로 도약할지, 아니면 새로운 시장에서 밀려날지가 갈릴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