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수프에 빠진 공시… 신뢰를 흔든다
국내외 기업들의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공시가 확대되는 가운데, 관련 개념과 용어가 뒤섞여 ‘알파벳 수프(alphabet soup)’ 현상처럼 혼란을 빚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알파벳 수프(alphabet soup)’ 현상은 약어(acronym)와 영문 이니셜이 너무 많이 등장해 일반인이나 전문가조차 헷갈리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쓰인다.
지속가능성 공시 영역에도 CSR, CSV, ESG, GRI, TCFD, ISSB, CSRD, ESRS 등 수많은 약어와 기준이 존재한다. 관련 제도와 보고 기준이 난립해 비교·이해가 어렵고, 기준 간 중복·충돌까지 생기고 있다.
ESG는 수단, 지속가능성은 목표… 공시 용어 표준화 해야
한국회계학회 '회계저널' 최근호에 게재된 전규안 숭실대 회계학과 교수의 '지속가능성 공시 및 인증 관련 주요 개념과 용어에 대한 고찰' 논문은 이 알파벳 수프 현상을 지적했다. 지속가능성 공시와 인증의 용어 체계가 일관되지 못해 투자자와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불필요한 혼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기업이 장기적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인 반면, ESG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수단·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우선 제도적 명칭과 보고서 이름은 ‘ESG 보고서’보다는 ‘지속가능성보고서’로 통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전히 일부 국내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대신 ‘ESG 보고서’라는 용어를 혼용하는 경우도 있어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많은 언론과 기업 보고서에서 ESG 정보를 ‘비재무정보’로 표현하고 있으나,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와 KSSB(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가 제정한 기준에 따르면 ESG 정보는 투자자 의사결정에 직결되는 재무정보다.
“지속가능성 공시, 비재무 아닌 재무보고 연장선상에 있어야”
예컨대 KB금융그룹은 2023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 실적을 공시했는데, 이는 단순 사회공헌 차원을 넘어 장기 자본비용과 직결된 재무적 성격을 지닌다.
실제 유럽연합(EU)은 과거 ‘비재무보고(NFRD)’에서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으로 용어를 정비했다. 실제 ESG 정보를 ‘비재무정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와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기준에 따른 정보는 엄연히 재무정보다.
전 교수는 “투자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과 기회를 다루는 만큼, ISSB와 KSSB 기준은 재무보고의 연장선상에 있다”며 “이를 단순히 비재무정보로 분류하는 것은 부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공시 용어 해석도 제각각이다. 중요성(materiality)은 ‘중요성’과 ‘중대성’으로 혼용되고 있다. 회계나 지속가능성 공시에서 중요성(materiality)은 “정보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가?”를 판단하는 개념이다.
단일 중요성 vs 이중 중요성… 기준별 관점 차이 뚜렷
그런데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기업·보고서는 이를 ‘중요성’이라고 기술하지만 또 다른 보고서·기관은 '중대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24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중대성 평가’를 사용했고, 포스코홀딩스는 같은 해 유럽 ESRS 기준과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중 중요성 평가(double materiality)’로 표현했다.
중요성과 중대성 모두 “어떤 정보를 공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개념이다. IFRS S1, KSSB 기준 등은 회계기준 용어와 일관되게 ‘중요성'으로 정의하고 있는 만큼 용어를 통일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쪽 관점만 고려해서 정보를 공개하는 방식인 단일 중요성(Single Materiality)과 두 가지 관점(재무 + 임팩트)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중 중요성(Double Materiality)도 기준별로 무엇을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보고서 전체는 ‘인증’, 온실가스 배출량은 ‘검증’
ISSB·SEC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재무중요성'을, GRI는 이해관계자 보호를 위한 '임팩트 중요성'을, EU ESRS는 유럽 규제 환경의 특징을 반영해 양쪽을 결합한 '이중 중요성'에 주목한다.
어느 기준을 우선할지는 기업의 영업 지역, 투자자 기반, 이해관계자 지도(stakeholder map)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ISSB·SEC·GRI·ESRS 기준을 동시에 모니터링하고, 자사 보고서에 반영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 SK 등 일부 기업은 ISSB+GRI 병행 공시를 시도 중이다.
보고서 신뢰성 확보를 위해 기업들이 제3자 인증을 확대하고 있으나, ‘인증(assurance)’과 ‘검증(verification)’을 혼용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 교수는 보고서 전체의 적정성을 확인하는 것은 ‘인증’, 온실가스 배출량 등 특정 수치를 확인하는 것은 ‘검증’으로 쓰는 것이 맞다고 했다.
‘표준’ 아닌 ‘기준’, ‘지배구조’ 아닌 ‘거버넌스’…용어 통일도 과제
예를 들어 대한항공은 ESG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온실가스 배출량 검증보고서를 별도 공개하지 않아 투자자들이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반대로 SK텔레콤은 지속가능성보고서와 온실가스 검증보고서를 동시에 공개해 모범 사례로 평가받은 바 있다.
또한 ‘standard’는 ‘표준’보다 ‘기준’으로, ‘Governance’는 ‘지배구조’보다 포괄적 의미의 ‘거버넌스’로 번역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분석이다.
유럽연합의 경우 ‘지침(Directive)’과 ‘규정(Regulation)’은 구속력에서 차이가 있으며, ‘보고(reporting)’와 ‘공시(disclosure)’ 역시 범위와 법적 제재 측면에서 구분된다.
전 교수는 더 나아가 "'가치사슬(value chain)'은 제품·서비스의 전 과정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개념이고, '공급사슬(supply chain)'은 자원의 이동과 유통에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공시 일원화·가이드라인 마련 나서야
지속가능성보고서 발행 연도가 제각각이어서 투자자 혼선을 유발하는 것도 문제다. KB금융은 2024년 6월 ‘2023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대한항공은 2024년 7월 ‘2024 ESG보고서’를 각각 발간했다.
전 교수는 “재무제표와 마찬가지로 보고서 발간 연도를 보고 대상 연도로 통일해야 한다”며 “사업보고서와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동시에 공시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개념과 용어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으면 기업 간 비교 가능성이 떨어지고,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도 ▲사업보고서와 지속가능성보고서의 공시 시점 일원화 ▲국제기준(ISSB·ESRS)과 연계된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 가이드라인 마련 ▲용어·번역 표준화를 통한 법·제도적 혼란 최소화에 대비해야 할 때이다.
금융위원회와 회계기준원, 한국거래소 등이 협력해 공시 의무화를 추진 중인 만큼, 국내 기업들이 중복 규제나 이중 부담에 시달리지 않도록 조율하는 작업에서 그 성패가 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