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DPP·PEF 대전환...‘LCA 시대’ 눈앞
탄소중립 규제의 시계가 빨라지면서 ‘LCA(Life Cycle Assessment·전과정 평가)’가 기업의 전략 중심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LCA(Life Cycle Assessment·전 과정 평가)를 기반으로 한 규제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기업이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 산업에서는 LCA 없이는 유럽 시장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섬유·가전 분야에서는 DPP가 일종의 ‘비관세 장벽’으로 기능할 전망이다. 탄소발자국은 점점 더 기업가치를 평가하는 금융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수출을 계속하려면 LCA를 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온 셈이다. 전문가들이 앞다퉈 '2025~2028년은 LCA 의무화의 빅뱅'으로 보는 까닭이다.
LCA는 한 제품이 원료 채굴→제조→운송→사용→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정량화하는 국제적 평가 체계다. 단순 탄소발자국 계산을 넘어, 자원 고갈·생태독성·대기오염 등 15~19개 범주의 환경 영향을 함께 계산한다. '한 순간의 배출'이 아니라 제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의 '한 생애의 발자국'을 보는 방식이다.
DPP (Digital Product Passport·디지털 제품 여권)는 EU가 도입하는 ‘제품의 전 생애주기 정보를 담은 디지털 여권’으로, 제품이 유통·사용·폐기되기까지의 환경·사회·공급망 데이터를 모두 담은 전자 기록 시스템이다. EU는 이를 순환경제·지속가능 소비 규정(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ESPR)의 핵심 도구로 사용한다.
DPP에 담기는 정보로는 원자재 종류 및 출처, 생산 과정의 에너지·물·탄소 정보, 제품에 사용된 재활용 원료 비율, 화학물질 정보, 제조·유통·사용 단계의 환경 영향, 폐기·재활용 방법, 탄소발자국 및 LCA 기반 환경 데이터 등이다. 즉, DPP는 '제품의 환경 성적표'이다.
배터리 부문은 2027년부터 의무화, 섬유·가전·전자제품 등은 2030년대 순차 확대가 예고돼 있다. EU 수출을 위한 새로운 비관세 장벽으로 기능할 것이란 점에서 한국 수출업계의 적극적 대응이 요구된다.
PEF (Product Environmental Footprint·제품 환경발자국)는 EU가 만든 ‘제품의 환경 영향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평가하는 LCA 기반 방법론이다. EU 규제·유통·라벨링에 활용하기 위해 만든 사실상의 EU 표준 LCA 방식이다.
제품군별 규칙(PEFCR)을 마련해 유럽 시장에서 동일한 계산 방식을 적용해 동일 제품군 간 비교 가능성 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이때 제품의 환경영향을 16~19개 카테고리로 평가(기후변화, 수자원, 토양산성화, 생태독성 등)한다. ISO 14040/44 기반이지만 EU 요구사항을 대거 반영해 독자적 규범성을 강화했다.
향후 EU 시장에서 환경 성능 비교의 기준점으로 기능할 것으로 보여 EU 규제·라벨링·조달·DPP 데이터 구조의 기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이 자체 방식의 LCA를 하더라도 PEF 방식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에 수출하려면 그들이 정한 방식대로 환경 발자국을 계산하라”는 규칙인 셈이다.
글로벌 규제 속 기업의 핵심 전략으로 부상
우선 EU가 추진 중인 ‘녹색 주장 지침(Green Claims Directive)’은 기업의 친환경 마케팅을 전면 재편할 규제로 꼽힌다. 앞으로 “친환경”, “저탄소” 같은 문구를 쓰려면, LCA에 기반한 검증 자료를 갖춰야 한다. 시행 시점은 2027년으로 예상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계속 바뀌고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조준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고 있다.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DPP)’도 파급력이 크다. 배터리는 2027년, 가전·섬유는 2030년대부터 제품 단위의 LCA 데이터가 내장된 디지털 여권을 의무적으로 붙여야 한다. '친환경 제품' 홍보 만으로는 안 되고, 원료 채굴부터 제조·유통·사용·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의 환경 데이터를 함께 제시해야 시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과 이를 구체화한 ESRS가 더해지면서, 대기업들은 제품·공정 단위의 환경 영향을 공급망(Scope 3)까지 포함해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안게 됐다.
이 같은 규제를 앞두고 많은 기업이 LCA 자동화 솔루션 도입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시간 절감' '완전 자동화' 등의 솔루션 홍보 문구와는 다르게 LCA 실제 구축 과정은 훨씬 크고 지속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데이터의 질, 평가 기준의 불확실성, 급변하는 규제 환경, 데이터베이스(DB) 업데이트 등 조직의 시스템·데이터·거버넌스의 재구성을 포함하는 이슈다. 전사적 디지털 과제이기 때문이다.
준비 안 된 데이터가 기업 LCA 발목 잡는다
즉, LCA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도입으로 종료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IT 인프라 재구축에 가까운 작업이다. ERP, PLM, MES, 재무·구매·물류 시스템 등 회사 안에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하나의 언어로 묶어야 자동화가 제대로 작동한다. 조광국 SK이노베이션 LCA팀장은 소셜미디어 연재 게시글에서 '전사적 디지털 과제'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부품명세서(BOM)가 불완전하고, 공급업체 정보가 비어 있고, 시스템마다 단위·형식이 제각각이면 자동화는 그저 '잘못된 값을 더 빨리 계산해주는 기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데이터 품질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아직도 많은 기업의 구매 기록에는 '플라스틱 1500kg' 정도만 적혀 있다. 그러나 LCA를 하려면 폴리에틸렌(PE)인지, 폴리프로필렌(PP)인지, 재생원료인지, 어느 나라에서 어떤 공정으로 생산됐는지, 어떤 운송 수단으로 얼마만큼 이동했는지까지 필요하다.
이처럼 누락된 정보를 채우고, 형식을 표준화하고, 공급업체로부터 추가 데이터를 받아 검증하는 과정은 자동화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사전 작업’이다. 실제로는 시스템 구축보다 데이터 정제와 수집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구축 2~3년 뒤 무용지물 시스템 될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 역할이 관건이다. LCA는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할 것인지 설계하는 작업에 가깝다. 기능 단위(Functional Unit)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시스템 경계를 어디까지 잡을 것인지, 어떤 데이터베이스와 배분 방법을 쓸 것인지 등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결과가 나온 뒤에도 민감도 분석, 핫 스팟(Hotspot) 검증, 불합리한 수치의 원인 추적, ISO 기준 준수 여부 확인, 제3자 검토 대응 등은 모두 사람의 해석과 판단에 달려 있다.
기업이 초기 구축을 완성하더라도 LCA 시스템의 진짜 과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가장 먼저 마주치는 장벽은 백그라운드 DB 업데이트다.
ecoinvent, GaBi와 같은 데이터베이스는 매년 버전이 올라가면서 지역 범위를 확대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공정을 추가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동일한 제품을 다시 계산했을 때 결과가 약 15% 안팎으로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구축 당시에는 정상으로 보이던 모델이 2~3년이 지나면 '시대에 뒤떨어진 모델'로 판정날 수 있는 것이다.
LCA 리스크는 규제-제품-거버넌스 변화
규제 변화는 그보다 더 예측하기 어렵다. PEF는 여전히 개정 중이고, DPP의 세부 기준도 확정되지 않았다. GHG 프로토콜(Protocol) 개정 논의까지 더해지면서, 지금 기준에 맞춰 완벽하게 시스템을 구축해도 몇 년 뒤에는 다시 설계해야 할 수도 있다.
변화를 앞서가려다 너무 일찍 투자하면 잘못된 방향으로 자원이 묶이고, 변화가 확정되기를 기다리다 너무 늦게 움직이면 규제 위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LCA 관련 기업의 딜레마이다.
현장의 생산 공정과 제품 포트폴리오가 끊임없이 바뀌는 점도 문제다. 공정 개선, 설비 교체, 신제품 출시가 이어지는데 자동화 모델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시스템은 금세 현실과 동떨어진 계산만 반복하게 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주요 원료 공급업체가 바뀌면, 기존에 구축한 공급망 데이터는 사실상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인력 리스크도 크다. 구축 과정과 판단 기준을 꿰고 있는 핵심 담당자가 퇴사할 경우, 시스템은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블랙박스'가 되기 쉽다. 이때부터 조직은 시스템을 믿지 못해 일부만 쓰거나, 결국 수동 분석으로 회귀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기업·정부 모두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 다수가 '자동화 솔루션을 고르는 일'보다 '데이터와 거버넌스를 정비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재 코드 체계를 통일하고, 구매·생산·물류 데이터를 LCA에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분화하며, 공급망 데이터를 수집할 표준 템플릿을 만드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ESG, 품질, IT 부서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로는 LCA를 중심으로 한 전사 시스템을 만들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배터리·철강·석유화학·전자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은, DPP와 PEF를 전담으로 모니터링하고 대응 전략을 짜는 국제 표준 대응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EU는 자국 중심의 데이터베이스를 키우며 자국 산업에 유리한 기준을 사실상 설계하고 있다. 한국이 뒤따라가기만 할 경우, LCA 기준 자체가 새로운 무역 장벽으로 작동할 위험이 크다.
전문화, 자동화, 범정부적 지원 체계화
전문가들은 ▲국가 LCI DB의 고도화와 산업별 최신화 ▲한국 공정·원료 특성을 반영한 대표성 검증 시스템 ▲중소기업을 위한 LCA 지원센터 ▲배터리·철강 등에서의 아시아 표준 선도 전략 등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DPP가 본격 시행되면,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공공 인프라가 필수라는 판단에서다.
기업의 경우 전문가와 자동화의 투트랙 전략이 현실적인 해법으로 제시된다. 내부에 LCA 전문가를 1~2년 단위로 양성하고, 초기에는 외부 컨설턴트와 함께 로드맵을 설계한 뒤, 반복·대량 계산이 필요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자동화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해석·검증·의사결정, 이해관계자 커뮤니케이션은 전문가가 중심을 잡고 이끌어야 한다.
데이터와 조직 역량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기 자동화를 서두를 경우, 빠르게 계산하지만 잘못된 결과를 내놓거나, 고객사·검증기관과의 해석 충돌이 반복되고, 규제 검증 과정에서 수정 요구가 쏟아지는 등 부작용이 더 클 수도 있다. 한 번 신뢰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낙인이 찍힌 LCA 솔루션은, 내부에서 다시 활용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결국 한국 산업이 선택해야 할 전략은 “LCA 시대에 적응하는 조직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솔루션을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라, 기업과 정부를 포함한 전체 시스템을 어디까지 다시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LCA는 향후 10년간 한국 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무역 규범의 언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