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고탄소 산업일수록 담보가치 낮게 평가
유럽중앙은행(ECB)이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할 때 적용하는 담보 평가 체계에 처음으로 '기후 요소(climate factor)'를 도입했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일수록 담보가치를 더 낮게 평가해, 은행이 같은 채권을 맡기더라도 빌릴 수 있는 자금 규모를 줄이는 방식이다.
이번 조치는 ECB가 2026년 6월 15일부터 시행한 새로운 담보 프레임워크의 핵심 내용으로, 기후변화가 중앙은행의 재무 건전성과 통화정책 운영에 미칠 위험을 직접 반영한 첫 사례로 평가된다.
ECB는 7일(현지시간) 공개한 블로그를 통해 "기업 발행자가 미래의 기후 전환 충격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은행은 동일한 금액의 회사채를 담보로 더 적은 금액을 차입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과거 데이터 대신 미래 시나리오 반영한다
이번 제도는 ECB가 2022년부터 추진해 온 '통화정책의 기후 통합'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앞서 ECB는 기업채권 포트폴리오의 탈탄소화, 담보자산의 기후정보 공시 의무화 등을 추진해 왔으며, 지난해 실시한 유로시스템 기후 스트레스 테스트에서는 기후변화가 금융자산 가치에 예상보다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결과가 확인됐다.
ECB는 "기후변화는 기업에 전례 없고 불확실하며 잠재적으로 심각한 경제적·재정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지만, 이러한 위험은 과거 가격 데이터만으로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새로운 기후 요소는 기존 담보평가 방식과 달리 과거 시장 데이터가 아닌 미래지향적 시나리오 분석을 활용한다.
ECB는 먼저 담보로 제출되는 각 회사채에 대해 '불확실성 점수(uncertainty score)'를 산정한다. 이 점수는 세 가지 요소를 곱해 계산된다.
각 회사채에 스트레스 요인, 취약성 등 고려
먼저 산업별 '스트레스 요인(stress factor)'가 있다. 탄소집약도가 높은 산업일수록 저탄소 경제 전환 과정에서 자산가치가 크게 하락할 가능성을 반영한다. 그 다음은 기업별 '노출도(exposure)'다. 온실가스 배출량, 탈탄소 목표 설정 여부, 기후 관련 공시 수준 등을 평가한다.
이어 자산별 '취약성(vulnerability)'도 반영한다. 채권의 잔존만기가 길수록 미래 기후정책 변화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산출된 불확실성 점수는 실제 담보가치 할인에 적용되는 기후 요소로 변환된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이 100유로인 회사채에 기존 헤어컷(haircut) 10%가 적용되면 은행은 90유로를 차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후 요소가 0.978로 적용될 경우 실제 차입 가능 금액은 88유로로 감소한다.
ECB는 특히 유틸리티, 소재, 운송 산업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 산업은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고 자본집약적이며 규제 변화에 민감해 저탄소 전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주요 중앙은행, 기후위험 반영 확대 움직임
반대로 소프트웨어나 소비자서비스 업종은 전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아 담보가치 감소폭도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산업 내에서도 기업별 차이는 발생한다. 배출량이 많거나 탄소감축 계획이 미흡하고 기후 관련 공시가 부족한 기업일수록 담보가치가 더 크게 할인된다. ECB는 이번 조치가 기존 신용위험 평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신용등급이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평가한다면, 기후 요소는 기후변화로 인해 자산의 시장가치가 얼마나 하락할 수 있는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ECB는 "기후 요소는 기후 관련 불확실성을 담보 평가에 반영하는 새로운 위험관리 수단"이라며 "기후위험이 변화하는 만큼 새로운 데이터와 규제, 위험평가 기법을 반영해 정기적으로 제도를 개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는 은행들의 중앙은행 차입 규모와 회사채 담보 비중이 크지 않아 시장에 미치는 즉각적인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ECB는 전망했다. 이와 관련 영국은행(Bank of England, BoE)도 최근 회사채 담보 평가 체계에 기후 관련 위험을 반영하는 방안을 도입하기로 하는 등 주요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 운영 과정에 기후위험을 본격적으로 반영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