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미래형 생명과학 기업’ 4가지 조건
현대 생명과학 산업은 탄소중립과 공급망 리스크, 에너지 비용 급등이라는 ‘삼중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지속가능성을 비용이 아닌 경쟁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지 꽤 오래 됐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지속가능성 화두는 에너지·원가 안정화, 공급망·가동 리스크 감소, 규제·거래 조건 충족, 자본·보험 비용의 차별화, 품질/컴플라이언스 비용 절감을 통해 실질적인 경쟁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제약·바이오 생산은 공조(HVAC), 클린룸, 냉동·냉장(콜드체인), 순수(WFI)·증기·압축공기 등 유틸리티 의존도가 매우 높아 에너지 단가 변화가 곧바로 제조원가에 반영된다. 이에 따라 효율화(설비 최적화, 열회수, 수요제어 등)와 전력조달 다변화(재생에너지, 저장장치, DER)는 '환경 투자'인 동시에 원가 변동성 방어에 절대적이다.
공급망 리스크 상시화...조달 차질 상시화
오늘날 원부자재(용매·레진·일회용백·유리 바이알·포장재), 물류(항공/해상), 위탁생산(CMO) 등 공급망이 길고 세계 곳곳에 산재한 상황인 만큼, 지정학·팬데믹·기후재난으로 조달 차질이 상시화 하는 흐름이다. 지속가능성 관점의 공급망 관리(대체 공급선, 지역 다변화, 스코프3 데이터 관리, 물류 최적화)는 생산중단·결품·리콜 같은 고비용 사건을 줄이는 것이 사업 연속성(BCP) 경쟁력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글로벌 고객(대형 제약사), 공공조달, 병원·보험 등에서 탄소/ESG 요건을 납품 조건으로 제시하는 상황이 본격화하고 있어 감축 및 데이터 체계가 곧 거래 조건으로 부상하였다. 여기에 설비투자 규모가 큰 산업 특성상, 금리·조달조건이 작은 차이로도 총비용을 크게 바꾼다. 탄소·에너지·안전 리스크를 정량관리하는 기업은 녹색금융 등으로 자본비용을 줄일 여지가 커졌다. 반대로 리스크가 크면 보험료·조달비용이 올라 보이지 않는 비용이 누적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글로벌 복합기업 지멘스가 2023년 발간한 생명과학 업계 리더들이 지속가능성 목표를 자신 있게 추구하도록 돕는 '지속가능성의 영향력 확대(Multiplying the Impact of Sustainability-A whitepaper to help life science leaders pursue sustainability objectives confidently)' 백서는 배출 저감과 인프라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실행 프레임으로 ‘4단계 접근법’을 제시했다.
백서는 유엔 '배출격차보고서(2022)'를 인용해, 현 정책 기조가 유지될 경우 금세기 말 약 2.8℃ 상승 경로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COP26 이후 각국 공약이 추가됐지만 2030년 배출 전망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며, 조건부·무조건부 공약을 모두 반영해도 2.4~2.6℃ 수준이라는 것이다.
“의료는 전 세계 배출의 4.4%”…스코프3가 관건
생명과학 산업 역시 에너지 사용, 운송, 제품 제조·사용·폐기 전 과정에서 배출이 발생한다. 특히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와 탄소집약적 공급망 조달이 배출의 핵심 축으로 꼽힌다.
백서는 세계경제포럼(WEF) 자료를 근거로 "헬스케어 부문이 전 세계 배출의 4.4%를 차지한다"면서, "공장 에너지 절감(스코프1·2)을 넘어 원자재·물류·폐기 등 스코프3 감축이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고 진단했다.
여기에 규제의 지역별 상이성, 운영요건과 감축목표의 충돌, 데이터 통합, 투자 대비 효과(ROI), 공시 요구 등 기업이 마주하는 현실적 난제를 열거하며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규제 대응 수준이 아니라 전략 비전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백서는 지속가능한 생명과학 기업이 갖춰야 할 방향으로 ▲회복탄력성 강화 ▲유연성(모듈형·통합형 연구·생산 인프라) ▲장기 성과 관리 ▲환경과 비즈니스의 동시 성과를 제시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축으로는 탈탄소·에너지 효율, 자원 효율·순환경제, 전력 품질·레질리언스, 사람 중심(안전·보안·쾌적)을 들었다.
실행 가능한 전략 수립과 체계적 검증이 핵심
이번 백서의 중심은 생명과학 기업이 지속가능성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기 위한 4단계 실행 로드맵이다.
1단계는 실행 가능한 지속가능성 전략 수립이다. 기업별 생산 공정·설비·규제 환경이 달라 '맞춤형 설계'가 관건이다. 중대성 평가(Materiality)-목표·타깃 설정-프레임워크 기반 공약 정렬-포트폴리오 에너지·탄소 분석-핫스팟(고배출 구간) 파악 및 우선순위화 등이 주 내용이다.
이어 2단계는 체계적(시스템 기반) 실행과 검증이다. 백서는 컨설팅 기업 조사(Kearney)를 인용해, 스코프1·2 목표를 가진 기업 중 33%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고 언급하며 ‘목표 설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로드맵·마일스톤·역할과 자원 배분·모니터링/보고 체계를 갖춘 체계적 실행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행은 진단·설계(예비평가→투자등급 감사 및 비용편익 분석→M&V 방법론 수립)와 구현·최적화(재생에너지·저장장치·예측·데이터 분석·빌딩관리 등을 활용한 운영 최적화) 등 2단계로 나뉜다.
디지털·자동화로 지속가능성 ‘가속 페달’ 구현
다음 3단계는 디지털·자동화 기술로 지속가능성 가속 단계다. 지속가능 인프라 구축을 위해 디지털 트윈, 실시간 데이터 수집/분석, 수요제어 환기, 분산에너지자원(DER) 통합, 전력 레질리언스, 설비 모니터링, 품질 추적(블록체인 기반 라이프사이클 추적) 등이 대표적이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 비용 절감과 리스크 저감을 핵심 경쟁력으로 올리는 과정이다.
마지막 4단계는 ‘페이 애즈 유 세이브(Pay as you save)’와 XaaS 등 금융모델로 확산하는 것이다. 전환을 가로막는 CAPEX 부담을 낮추기 위해, 자체 투자, 성과기반 지불 즉, '먼저 절감, 나중 지불' 방식, XaaS(서비스형 모델) 등 다양한 금융·서비스 모델을 제시한다.
백서는 초기 투자 없이도 절감분으로 비용을 상환하거나, 설비 소유·운영 책임을 서비스 제공자와 분담해 빠른 성과를 노릴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소재 화이자(Pfizer)의 고위험 물질 생산시설(HighCon)은 빌딩 솔루션과 자동화·데이터 연계를 기반으로 전통적 공장 대비 에너지 소비를 약 40% 줄였다. 또 생산 데이터를 중앙 관리 시스템에서 상시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공장 생산능력은 연간 최대 120억 유닛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화이자 ‘에너지 40% 절감’...보조금-금융 결합 필요
지멘스가 설계·턴키 구현한 에너지 효율화 프로젝트를 적용한프랑스의 한 바이오의약품 시설은 연 60만 유로 규모의 절감 성과를 보장했다. 이는 현장 에너지 사용의 19% 이상에 해당한다. 보조금과 금융을 결합해 고객 측 현금흐름 부담을 낮춘 점도 특징으로 꼽았다.
디지털 트윈, 실시간 모니터링, 예지정비, 에너지관리시스템은 단순히 전기를 덜 쓰는 것을 넘어 품질, 규제, 원가 등을 함께 개선할 수 있는 셈이다. 특히 생명과학 분야는 ‘품질 손실’의 비용이 매우 크기 때문에 이 효과가 특히 크다.
백서는 "스코프3까지 포함한 감축, 전기화와 에너지 효율의 대규모 확장, 순환자원 흐름 촉진, 커뮤니티·파트너십 기반 실행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전례 없는 속도와 규모의 경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생명과학 기업에 지속가능성은 이제 ‘좋으면 하는’ 활동이 아니라, 규제·공급망·에너지 리스크 시대에 생산 연속성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인프라 전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수출·CDMO 비중 높은 한국 '원 패키지' 전환해야
환자 안전과 공공성을 다루는 산업인 만큼 신뢰가 핵심 자산이다. 탄소·폐기물·물 사용·공급망 윤리 이슈는 브랜드와 채용, 파트너십(공동연구/위탁생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장·고객·인재 측면의 ‘평판 리스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즉 지속가능성은 마케팅 차원을 넘어 '사회적 영업허가'를 강화하는 요소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위탁생산(CDMO) 비중이 높은 국내 제약·바이오·의료기기 산업의 경우 글로벌 고객이 요구하는 스코프 1~3, LCA, 재생전력 사용, 공급망 실사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면 시장 경쟁력 자체가 추락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에너지 집약적 공정이 많은 산업 특성상 효율화–저탄소 조달–데이터(MRV) 체계를 한 묶음으로 빠르게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단기적으로는 계측·실시간 모니터링과 공조, 유틸리티 최적화로 절감과 검증(M&V)을 확보하고, 중기적으로는 재생전력(온사이트+PPA+인증) 포트폴리오, 전력 회복성(UPS/ESS/비상전원), 공급망 스코프3 데이터 수집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신·증설은 설계 단계부터 탄소·에너지 목표를 고정해 전환 속도와 성과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