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평가의 게임의 법칙이 바뀐다”…‘ESG 공시 전쟁’의 막이 올랐다

2026년부터 국내 상장기업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가 의무화된다. 2006년 유엔 책임투자원칙(PRI) 서명 이후 20여 년 만에 ESG는 투자 판단의 핵심 지표로 자리잡았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가 2020년 “모든 투자 결정은 ESG를 기준으로 할 것”이라 선언하면서, 글로벌 자본시장은 완전히 다른 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기업의 ‘비재무 정보’가 이제는 재무제표 못지않게 투자자의 판단을 가르는 기준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제도 설계는 여전히 미완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발표한 <ESG 공시 의무화에 따른 국내 공시제도 개선방안> 보고서는 “공시제도의 체계적 설계 없이는 ESG 의무화가 오히려 기업 부담과 왜곡된 시장 신호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요국 ESG 공시기준 비교. 국내 기업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사실상 상당수의 국내 기업은 KSSB 기준뿐만 아니라 ESRS 기준도 동시에 준비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데이터 출처: 조혜진, 'ESG보고서와 검증⑭, 지속가능성 4대(GRI, ISSB, ESRS, SEC) 표준의 특징, 딜사이트경제TV, 2023. 8. 21(https://buly.kr/3NHwZcj) 바탕으로 재구성. 이미지 출처: 보고서에서 캡처.
KDI(양용현·박진수·민소연·김병연)

“기준은 세계가 정한다”… GRI·ISSB·EU·SEC 격돌

금융위원회는 2026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을 시작으로 ESG 공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기로 했다. 2030년에는 모든 상장사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내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는 ESG 공시의 ‘형식’을 맞추는 수준이었지만, 앞으로는 공시 내용이 기업 가치 평가의 직접적인 척도로 진화한다.

문제는 그 기준의 혼란 양상이다. GRI, ISSB, EU ESRS, 미국 SEC 등 세계 4대 공시체계가 각기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현장의 기업들도 “어떤 기준으로 보고서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터뜨린다.

GRI는 1997년 환경단체 ‘세리즈’와 유엔환경계획(UNEP)의 협약으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이다. 현재 전 세계 250대 기업 중 78%가 GRI를 사용하며, 한국 기업의 92%도 이 기준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ESG 공시 전쟁, 한국만 ‘반쪽짜리 기준’에 머물다

ISSB는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이 2021년 COP26 회의에서 출범시킨 ‘글로벌 통합 공시 기준’이다. TCFD·SASB·CDSB 등 기존 공시 프레임워크를 통합해 '지속가능성 관련 재무정보 공시의 글로벌 베이스라인'을 표방한다. 2024년부터 적용되는 IFRS S1(일반요구사항)과 S2(기후 관련 공시)가 그 핵심이다

EU는 한발 더 나아갔다. 2023년 발효된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은 역내 모든 대·중견·상장기업뿐 아니라, EU 내에서 매출이 발생하는 글로벌 기업까지 보고 의무를 부과한다. 이는 ‘EU식 ESG 블록경제’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미국도 SEC의 기후공시 기준을 통해 Scope 1~3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그러나 한국의 ESG 공시 제도는 반쪽짜리다. 한국회계기준원 산하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가 발표한 공시기준 초안은 ISSB와의 정합성을 높였지만, 여전히 미비점이 많다.

사회적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KSSB 초안의 과제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 범위(Scope 3)의 불명확성 ▲산업별 표준 부재 ▲거버넌스 공시항목의 불균형 ▲검증 절차의 비표준화 등을 주요 문제로 거론했다.

EU는 기업의 가치사슬 전반을 아우르는 ‘더블 머티리얼리티(double materiality)’, 즉 재무적 영향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까지 고려하는 이중 중대성 개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한국 초안은 여전히 ‘재무적 중요성’ 중심이다. 보고서는 “이 접근으로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지속가능성 공시의 본질을 반영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현재 국내에는 ESG 공시와 유사한 정보공개 제도가 이미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환경부의 환경정보공개제도다. 2010년 시범사업 이후 2022년 기준 1,864개 기업이 온실가스·에너지·오염물질 배출량 등을 의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환경정보공개제도, 중복공시의 늪부터 걷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는 ISSB나 EU의 공시체계와 항목이 상당히 중복된다.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 에너지 사용, 수자원 관리, 환경경영 목표 등 주요 항목이 모두 동일하다"고 진단했다.

ESG 공시제도와의 통합 또는 조정 없이는 기업이 동일한 데이터를 여러 기관에 중복 제출하는 ‘공시 과부하’를 피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결국 환경정보공개제도의 일부 항목을 ESG 공시와 통합·조정하고, 검증 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ESG 공시 항목 중 투자·기술개발, 협력업체 환경관리 등은 기존 제도에서 중복되는 만큼 ‘공시 제외 대상’으로 명확히 분류해야 한다.

가장 큰 쟁점은 스코프(Scope) 3이다. 기업이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량 즉, 협력업체와 소비자의 활동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포함하는 과제인데 글로벌 기업 중에도 이를 완전하게 산정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

2023년 500대 기업 중 ESG위원회 운영 현황. 자료 출처: 리더스인덱스, ‘ESG 경영’ 찻잔 속 태풍에 그치나…위원회 활동 제자리걸음 등. 이미지 출처: 보고서에서 캡처.
KDI(양용현·박진수·민소연·김병연)

“중소기업엔 다른 룰”...스코프 3, 금융배출량도 과제

보고서는 “국내 기업의 평균 Scope 3 공시 비율은 20%대에 불과하다”며 “공시 의무화 시기를 섣불리 앞당기면 수치 왜곡과 형식적 보고가 난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금융권의 ‘금융배출량(financed emissions)’ 공시 도입도 과제다. 은행이나 투자기관이 투자·대출을 통해 간접적으로 초래하는 배출량을 산정하는 것으로 현재 신용정보원 주도의 플랫폼 구축이 논의 중이다.

특히 ESG 의무공시가 본격화되면 가장 큰 부담은 중소기업에 떨어진다. ESG는 대기업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의 생존과 직결된다.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은 대기업의 협력업체에도 인권·환경 실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결국 수출 중소기업도 ESG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거래망에서 배제될 수 있다.

보고서는 ▲모듈형(MSME) 공시체계 도입 ▲간소화된 인증제 ▲정부의 데이터 플랫폼 지원을 제안했다. 특히 중소기업이 직접 ESG 보고서를 작성하는 대신, 업종별 협회나 공공 플랫폼이 기본 데이터를 제공하고 기업은 핵심 항목만 보완하도록 하는 ‘공유형 공시체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시의무화는 국가 프로젝트...한국형 모델의 진화 필요

ESG 공시 의무화는 시장 신뢰를 재설계하는 국가 프로젝트이다. 투자자는 숫자 이상의 신뢰를 짚는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지 못하면, 글로벌 자본시장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ESG는 ‘선언’이 아니라 ‘증명’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ESG 공시제도를 지속가능한 산업정책의 인프라로 다루지 못한다면 제도는 또 하나의 ‘규제 서류’가 될 뿐이다.

보고서는 “한국형 ESG 공시제도는 글로벌 기준과의 호환성을 유지하되, 국내 산업 구조와 기업 여건을 반영한 현실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ESG 데이터 표준화 ▲검증기관 인증제 ▲공시비용 세액공제 등 제도적 뒷받침을 병행해야 한다.

공시 제도의 본질은 기업에 새로운 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투명성과 시장 신뢰를 높이는 데 있다. ESG 공시를 통해 산업 전반의 에너지 효율, 인권·노동 환경, 지배구조 수준을 실질적으로 개선한다면 규제 효과를 넘어 국가 경쟁력의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