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녹색분류체계 전면 개편...기업·금융권 전략 재편 불가피
정부가 녹색금융의 기준선 역할을 해온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를 전면 개정하며, 국내 녹색금융 시장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장관 김성환)는 개정된 녹색분류체계를 2026년 1월 1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은 단순한 항목 추가를 넘어, 금융과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활용 가능한 투자 기준을 보다 정교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는 녹색채권, 녹색여신 등 환경책임투자 상품의 ‘판별 기준’으로 기능해 왔다. 즉, 어떤 경제활동이 녹색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금융자금의 흐름을 결정하는 제도적 인프라다.
재생에너지 ‘단일 기준’에서 ‘발전원별 기준’으로
이번 개정으로 녹색경제활동은 기존 84개에서 100개로 확대됐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발전·에너지 분야다. 그동안 ‘재생에너지 발전’이라는 단일 항목으로 묶여 있던 기준을 태양광, 풍력, 수력 등 발전원별로 세분화했다.
이는 재생에너지 사업의 기술 성숙도와 환경 영향, 수익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금융 기준에 반영한 조치로 해석된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세분화가 프로젝트 파이낸싱(PF)과 녹색채권 발행 시 리스크 평가를 보다 정밀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발전원별 기준이 명확해지면 투자자 입장에서 ‘녹색 프리미엄’을 합리적으로 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트펌프, 바이오항공유(SAF), 청정메탄올 등 차세대 저탄소 기술이 녹색경제활동으로 포함된 점도 주목된다. 이는 단기적 감축 수단뿐 아니라 중장기 산업 전환 기술까지 금융 지원 대상으로 명확히 편입하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산업 부문, ‘탄소중립 기술’과 배출권 제도 연동
산업 분야에서는 정책과 금융의 결합이 더욱 강화됐다. 정부가 제시한 ‘탄소중립 100대 핵심기술’과 배출권거래제 제4차 계획기간의 배출효율기준 할당(BM) 계수가 녹색분류체계에 반영됐다.
이는 기업의 공정 개선과 설비 투자가 단순한 환경 활동을 넘어, 금융 조달과 배출권 비용 절감으로 직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서 공정별 감축 활동을 별도의 녹색경제활동으로 규정한 점은, 글로벌 공급망 압박과 ESG 평가에 직면한 수출 기업들에게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향후 녹색여신이나 지속가능연계대출(SLL) 조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건물 분야에서는 녹색건축물 인정 기준이 상향되고, LEED 등 국제 인증이 포함됐다. 해외 연기금과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투자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에 해당한다. 부동산·인프라 분야에서 ‘국내 기준의 한계’를 넘어 글로벌 자본 유입을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건물·산림·기후적응…투자 스펙트럼 넓힌다
또한 산림 기반 탄소흡수원 조성 활동을 포함한 임업 분야가 새롭게 신설되면서, 자연기반해법(NbS)을 활용한 투자 모델도 제도권으로 편입됐다.
향후 탄소크레딧 시장, 자연자본 투자 논의와 맞물려 추가적인 금융 상품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번 개정에서 가장 구조적인 변화로 꼽히는 것은 기후변화 적응 목표의 전면 개편이다. 기후 감시·예측, 취약성 평가, 대응 역량, 인프라 강화 등 4개 영역으로 체계화하면서, 그동안 완화(감축)에 집중돼 있던 녹색금융의 범위를 적응 투자로 확장했다.
정부는 재난 대응, 도시 회복력, 기후 리스크 관리 분야에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LNG는 유보, 전환금융은 과제로 남겼다
다만 LNG 기반 에너지 생산 등 과도기적 경제 활동은 이번 개정에서 명확한 녹색 범주로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향후 전환금융 제도 개편을 통해 별도의 지원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국제적으로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그린’과 ‘전환’의 경계를 한국형 제도 안에서 단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접근으로 읽힌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이번 개정은 녹색 기준을 명확히 하면서 금융·산업계 활용성을 강화한 것”이라며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와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금융 분야의 핵심 이행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개정으로 단기적으로는 금융상품 구조와 기업 투자 전략의 재정비를 요구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녹색금융의 신뢰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녹색분류체계가 보다 촘촘해진 만큼, 이제 관건은 이를 실제 자금 흐름으로 연결하는 금융권의 실행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