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나면 버려라” 강요받는 한국…‘수리할 권리’는 없다

스마트폰 키 하나가 빠졌다. 소비자는 제조사에 예비 부품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부품이 없다, 새로 사라”였다. 결국 그는 멀쩡한 키보드를 한 대 더 사서, 필요한 키캡만 떼어 내 기존 제품에 옮겨 달았다. 나머지 키보드는 그대로 쓰레기가 됐다.

서울 시내 리페어 카페 ‘곰손’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곰손 담당자는 “설계도·수리 매뉴얼·전용 도구가 없으면, 일반 소비자는 대부분의 전자기기를 손댈 수 없다”고 말한다. 배터리 교체 방식이 모델마다 바뀌는 스마트폰의 경우, 겉으로는 동일한 제품인데도 배터리 크기·나사 규격이 달라져 자가수리가 사실상 막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유엔환경계획(UNEP)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물질자원 채굴량은 지난 50년간 세 배 이상 늘었고, 지금 추세라면 2060년에는 연간 1600억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제품을 오래 쓰고 고쳐 쓰는 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 셈이다.

제품 수리권 관련 국내 법률·제도·계획 간 연계성. 이미지 출처: 보고서에서 캡처.
KEI

자원 고갈 시대, 한국만 ‘수리할 권리’ 뒷북

유럽연합(EU)은 이미 2024년 ‘제품의 수리를 촉진하기 위한 공통 규칙 지침(Directive 2024/1799)’을 채택해, 제조사가 보증기간 동안에는 수리를 우선하고, 그 이후에도 일정 기간 수리 의무를 지도록 못박았다.

또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를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통해 수리가능성 점수, 디지털 제품 여권(DPP) 공개를 의무화했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TV·노트북 등에 10점 만점 ‘수리가능성 지수’를 라벨로 붙이고, 2025년부터는 내구성과 신뢰성을 포함한 ‘지속가능성 지수’로 확대했다.

영국은 세탁기·냉장고 등 주요 가전에 대한 예비 부품 장기 공급을 의무화했고, 미국과 캐나다 일부 주·주는 농기계·의료기기까지 ‘수리권’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는 환경 의제이자 산업 경쟁력 이슈로 격상됐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선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올해 시행된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은 한국판 순환경제 기본법이다. 이 법 제20조는 “제품이 조기에 폐기되지 아니하고 수리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예비부품의 확보, 배송기한 등을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다.

법은 있지만…“~노력하여야 한다”에 갇힌 수리권

문제는 바로 그 표현, “노력하여야 한다”에 있다. 강제력이 없는 임의 규정이라 제조사가 지키지 않아도 제재 수단이 없다. 구체적인 수리 기간, 부품 보유 의무, 수리 매뉴얼 제공 기준도 없다.

한국환경연구원(KEI)이 7월 발간한 정책보고서 '순환경제를 위한 제품 ‘수리권’ 이행전략 수립연구'는 이 조항을 두고 “범위와 대상이 지나치게 넓고, 방향성만 제시한 상태”라고 평가한다. 수리 정보를 소비자에게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제공하라”고 돼 있지만, 어떤 형식으로 얼마만큼 공개해야 하는지 방법은 비어 있다.

이 공백은 곧 소비자의 불편과 폐기물 증가로 이어진다. '곰손' 소비자의 사례처럼, 부품 하나 구하지 못해 멀쩡한 제품이 통째로 버려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KEI 연구진은 한국소비자원과 함께 전국 소비자 설문조사를 분석했다. 수리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수리 비용이 비싸다”는 응답이었다. 응답자의 56.7%는 비용을, 52.5%는 “수리 방법이 어렵다”, 51.4%는 “부품이 없다”, 47.3%는 “수리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를 지목했다.

“수리비 비싸고, 부품 없고, 정보도 없다”

수리가 잦은 품목 1위는 스마트폰이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수리가 쉬운 제품이라면 더 비싸도 선택하겠다”고 답했고, “일부러 수리가 어렵게 설계된 제품은 구매를 피하겠다”고 밝혔다.

산업계·수리업계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제조업체, 독립 수리업자, E-순환거버넌스 등 이해관계자를 상대로 인터뷰한 결과, 제조업체는 “자가수리·독립수리 후 사고가 났을 때 책임 범위가 불명확하다”, “수리 매뉴얼·부품을 공개하면 영업비밀이 유출된다”고 우려했다.

독립 수리업자는 “예비부품을 구하기 어렵고, 수리 매뉴얼이 없어 사실상 손댈 수 없는 제품이 많다”며 “현행 안전 인증제도와 충돌 위험도 있어 시장이 커지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결국 소비자는 비싸고 어려운 수리를 피해 새 제품을 사고, 제조사는 그런 소비 패턴을 전제로 더 짧은 교체 주기를 설계하는 ‘악순환’이 공고해지고 있다.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 요소. ‘지속가능한 제품 설계’는 원료, 생산, 사용, 재생 전 과정에서 제품·디자인·서비스의 생태친화적인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료 출처: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보도자료(2021.12.30), p.10.

무선청소기 분해해보니…수리업체도 손 떼게 만드는 설계

보고서는 ‘우선순위 품목’으로 무선 청소기를 골랐다. 국제 리페어 카페 네트워크의 2024년 자료에 따르면 청소기는 전 세계에서 수리 의뢰가 가장 많은 품목 가운데 하나이며, 수리 성공률도 62%로 비교적 높다.

연구진은 수도권 한 자원순환센터에서 실제 무선 청소기를 분해해 수리용이성 체크리스트를 적용했다. 평가 기준은 분해 난이도, 고정 장치 종류(나사·접착제·용접 여부), 수리 도구, 예비 부품 가용성, 수리 매뉴얼 존재 여부 등 11개 항목이었다.

그 결과 일부 제품은 나사 대신 플라스틱 걸쇠와 접착제로 주요 부품이 고정돼 있어, 분해 과정에서 부품이 파손될 위험이 컸다. 배터리와 모터가 일체형으로 설계된 모델은 특정 부품만 교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예비 부품 공급 기간도 제각각이어서, 보증기간이 지나면 핵심 부품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구진은 “현장 수리 경험이 풍부한 기술자조차 매뉴얼 없이 분해하기 어려운 구조가 많았다”며 “소비자 자가수리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 수리업체도 손을 떼게 만드는 설계”라고 평가했다.

‘에코모듈레이션’ 도입...수리 인프라와 세제 지원

보고서는 ‘수리권’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청사진을 내놨다. 핵심은 △법·제도 구멍 메우기 △인센티브 설계 △정보 인프라 구축이다.

우선 법·제도 구체화는 '순환경제사회법' 시행령 제10조 3항에 수리 매뉴얼 공개, 예비부품 최소 공급 기간, 부품·고정장치 표준화 등 구체 의무를 담고, 소비자기본법에는 ‘수리할 권리’를 명시해, 비용·기간·정보 제공 기준을 소비자 분쟁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재활용 의무만 보던 기존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에 수리용이성을 반영해, 수리가 잘 되도록 설계한 제품은 분담금을 깎아주는 방식도 거론된다. 프랑스에서 이미 시행 중인 제도다.

이어 보고서는 독립 수리업체에 대한 기술 교육·부품 공급 지원, 수리 우수 제품·기업에 대한 R&D 세액공제, 친환경 인증·녹색 공공조달에서 우대, 소비자의 수리비에 대한 연말정산 세액공제, 수리·리퍼비시 제품 사용 시 탄소중립포인트 적립 등도 제안했다.

“수리권은 환경정책이자 생활권”…마지막 골든타임

‘디지털 수리 이력시스템’ 구축도 긴요하다. 제품이 언제, 어디서, 어떤 부품을 교체했는지 디지털로 기록·표준화해, 중고 거래와 수리 시장의 신뢰를 높이고, EU가 준비 중인 디지털 제품 여권(DPP)과도 연계할 수 있도록 중장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법적 기반 마련 – 디지털 인프라 구축 – 기술·인력 양성 – 시장·민간 확산의 4단계 로드맵을 제시하면서 '수리 불량국가'라는 낙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사실 수리할 권리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다. 고장 난 청소기를 버릴지, 고쳐 쓸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스마트폰 배터리를 교체해 몇 년 더 쓰겠다는 소박한 의지를 제도와 시장이 뒷받침해 주느냐의 문제다.

현재 한국의 소비자는 여전히 '고장 나면 버리는' 구조 속에 갇혀 있다. 한국은 곧 EU의 강화된 규제 시험대에 오른다. 수리하기 어렵게 설계된 제품을 계속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새 게임의 규칙을 만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