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재난관리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예방 중심 재설계 시급”
기후위기의 가속화로 한국의 자연재난이 강도·속도·형태 모두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폭염·산불 같은 기존 재난은 더 치명적으로 변하고, 계절 패턴이 무너진 ‘괴물 폭우’, 불과 며칠 사이에 발생하는 돌발가뭄, 태풍·해수면 상승·집중호우가 겹치는 복합재난까지 등장하는 양상이다.
올해 여름만 해도 국내 기상 관측 사상 첫 40℃ 돌파, 9월 시간당 150mm 이상 쏟아지는 비정형 폭우, 2주 만에 저수율이 20%포인트 급락한 강릉 돌발가뭄 등은 기존 모델로 예측이 불가능한 ‘비정상성(non-stationarity)’ 재해가 닥쳤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2019~2023년) 자연재해 피해액은 연평균 1조 3,750억 원. 직전 5년(2014~2018년) 1,980억 원 대비 7배 증가했다.
재난 피해 5년 새 7배 폭증…과거 통계 기반 대응체계로는 감당 못해
이 같은 피해규모의 급증 배경에는 과거 평균·과거 패턴에 기반해 설계된 현행 재난 대응체계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의 대응 중심 재난관리 체계가 한계에 직면한 셈이다.
거기에 폭염이 원전 냉각 효율을 떨어뜨리거나 산불 후 호우가 연쇄적으로 산사태를 유발하는 등 재난이 산업·에너지·교통으로 연쇄 확산하는 양상도 크게 늘고 있다.
사단법인 넥스트가 공개한 이슈브리프 <기후리스크에 기반한 예방 중심 재난관리의 필요성>은 최근의 기후 재난 피해를 고려해 '예방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했다.
하지만 한국의 예방 예산 비중은 5.8%(제3차 국가기후변화 적응 강화대책 기준)에 불과하다. 반면 대응·복구 예산은 39.9%로 급증,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예방예산 5.8%, 대응·복구 39.9%”…재난관리 구조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국제 연구기관들은 “예방 1달러는 4~15달러의 피해를 줄인다”고 분석한다. 미국에서는 건물 내진 보강의 경우 1달러 투자에 11달러의 경제적 편익이 발생한다는 연구도 있다.
보고서는 “정부는 ‘예방투자 확대’를 강조하지만 실제 예산 구조는 점점 더 사후 대응·복구 중심으로 기울고 있다”며 “예방은 비용이 아니라 국가생존을 위한 전략적 투자로 전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기후리스크 기반 의사결정체계 구축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의 많은 설계 기준은 여전히 과거 데이터에 기반한다.
보고서는 이를 ‘구조적 병목’으로 진단하며 '기후 시나리오 기반 위험(Hazards)·노출(Exposure)·취약성(Vulnerability)'을 정량화하고, 예산·사업 심사·설계 기준에 자동 연동하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해와 피해의 개념 자체를 재설계해야”…총손실계정(SLA) 도입 주장
특히 “임계치(threshold) 초과 시 설계·투자 기준을 자동 상향하는 ‘트리거형 리스크 관리체계’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는 영국 CCRA, 미국 FEMA, EU 기후프루핑 등 해외 주요 사례에서 이미 적용된 방식이다.
재해·피해 개념의 재정의로 뒷받침해야 한다. 현재 피해 통계는 인명, 시설·농경지 등 직접 피해에 한정돼 교통·에너지·물류 마비 등 간접 피해는 누락된다. 대설로 인해 항공기 150편이 결항하거나 물류가 중단돼도 이는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한국의 피해 규모는 구조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며 사회·경제적 연쇄 피해까지 포함하는 총손실계정(Summary Loss Account) 도입을 촉구했다.
또한 재해 유형을 ‘과거 기준 6대 재난’으로 고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폭염·돌발가뭄·복합재난·해수면 상승 등 새롭게 등장하는 위험을 ‘기후 변화의 함수’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4차 대응대책,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 돼야”
정부는 연말께 '제4차 국가 기후위기 대응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대책은 기존 ‘적응대책’ 명칭을 넘어 처음으로 ‘대응대책’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며 정책 방향 전환이 예고된 상태다.
그러나 보고서는 “현재까지 공개된 내용만 보면 여전히 재난 방지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예방 중심·리스크 기반·동적 적응형 관리체계를 제도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데이터는 쌓이지만 예방에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혁신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는 앞으로 닥칠 기후 재난의 속도와 강도를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예방 중심의 리스크 관리체계로의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 생존전략으로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제4차 국가 기후위기 대응대책이 그 여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