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지속가능금융 단체들, 비EU 기업에 대한 완화된 ESG 공시 기준 반대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금융 관련 전문가 단체들이 역외 기업에 대한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완화하려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움직임에 반발하고 나섰다.

EU 기업과 비EU 기업에 서로 다른 공시 기준을 적용하면 지속가능성 정보의 비교 가능성과 신뢰성이 떨어지고, 투자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누락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EU 집행위원회의 지속가능금융 정책 자문기구인 지속가능금융 플랫폼(Platform on Sustainable Finance·PSF)과 유럽 지속가능·책임투자협회(Eurosif)는 최근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이 마련한 비EU 기업 대상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40a) 공개 초안에 대한 의견을 각각 제출했다.

지속가능금융 플랫폼(Platform on Sustainable Finance·PSF)이 EFRAG에 보낸 답변서 표지. 이미지 출처: 답변서 캡처.

비EU 기업 ESG 공시 기준 마련…글로벌 영향 보고 범위가 쟁점

두 단체는 공통적으로 비EU 기업의 환경·사회적 영향에 대한 보고 범위를 EU 관련 활동으로 제한하는 이른바 '혼합 접근 방식(mixed approach)'을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논쟁은 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을 역외 기업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와 관련돼 있다. CSRD는 기업이 지속가능성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지속가능성 관련 위험과 기회까지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다. EU에서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영위하는 비EU 기업도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자국을 포함한 글로벌 사업 활동에 대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보고해야 한다.

비EU 기업에 적용할 세부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EFRAG가 2026년 7월 공개한 ESRS-40a 초안은 기존 ESRS와 달리 기업의 지속가능성 영향에 보고 초점을 맞췄다.

특히 기후변화를 제외한 일부 지속가능성 주제에 대해서는 기업이 글로벌 사업 전체의 영향을 보고하거나, EU에서 판매하는 제품·서비스 및 EU 내 사업 활동과 관련된 영향만 공개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선택적 ESG 공시의 함정…그린 워싱·인권 영향 누락 우려

문제는 이러한 선택적 보고가 기업 간 정보의 비대칭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환경·인권 문제 가운데 EU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은 공시에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산업과 사업 활동을 영위하는 기업이라도 EU 기업인지 비EU 기업인지에 따라 공개하는 정보의 범위가 달라지는 결과도 발생한다.

EFRAG 내부에서도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EFRAG가 공개 초안과 함께 발표한 '결론의 근거(Basis for Conclusions)'에 따르면, 회원들은 혼합 접근 방식이 EU 기업과 비EU 기업 사이의 공정한 경쟁 환경을 저해하고, 지속가능성 주제별로 서로 다른 보고 범위를 적용할 경우 정보의 이해도와 비교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인권과 환경 영향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면 그린워싱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환경 영향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EU 관련 영향만 분리해 보고하도록 하는 방식 자체가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PSF는 혼합 접근 방식이 지속가능성 정보의 비교 가능성을 약화시키고 EU 기업과 비EU 기업 사이에 투명성 측면의 불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혼합 공시, 투자자 정보 부담 키우고 EU 분류체계 정보 공백 초래

또한 정보의 유용성과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보고 체계의 복잡성을 높여 기업의 공시 비용까지 증가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EU 외 지역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환경·인권 문제를 가릴 수 있고, 투자자가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평가하는 데도 어려움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유로시프 역시 혼합 접근 방식이 투자자에게 불완전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글로벌 사업 활동에 관한 정보가 누락되면 투자자는 별도의 자료를 확보하고 분석해야 하므로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지속가능성 주제마다 보고 범위가 달라지는 것도 기업 간 비교와 투자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두 단체가 공통적으로 문제 삼은 또 다른 쟁점은 EU 분류체계(EU Taxonomy) 관련 정보 공개가 ESRS-40a 초안에서 제외됐다는 점이다.

EU 분류체계는 경제활동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녹색투자 여부를 평가하는 데 활용된다.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EU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정(SFDR) 등에 따른 공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기업의 분류체계 정렬(Taxonomy Alignment) 정보를 필요로 한다.

EU 분류체계 정보 공백 우려…역외 기업 공시 의무 2029년 시행

PSF와 유로시프는 비EU 기업의 분류체계 관련 정보가 빠질 경우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투자 대상 기업의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평가하고 관련 공시 의무를 이행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두 단체는 비EU 기업이 연결 기준의 분류체계 정렬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ESRS-40a를 보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로시프는 특히 비EU 기업의 자회사가 이미 EU 분류체계에 따른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경우, 모기업 차원에서도 연결 기준의 관련 정보를 자발적으로 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논쟁은 EU 역외 기업에 대한 CSRD 적용 범위와도 맞물려 있다. 개정된 CSRD에 따르면 EU에서 연간 순매출 4억5000만 유로를 초과하는 비EU 최종 모기업이 EU 내에 순매출 2억 유로를 초과하는 자회사 또는 지사를 보유한 경우 관련 공시 의무가 적용된다. 해당 기업은 비EU 기업을 위한 ESRS-40a를 적용하거나 EU 기업에 적용되는 전체 ESRS를 준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비EU 기업에 대한 관련 보고 의무는 현재 2028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2029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기업 부담 완화냐, 정보 투명성이냐”…ESG 공시 형평성 논란

PSF는 EFRAG에 제출한 의견에서 최종 기준이 EU 기업에 적용되는 ESRS와 높은 수준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EU 기업에 적용되는 법적·제도적 특수성은 반영하되, EU 지속가능금융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분류체계 관련 정보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속가능성 영향에 대한 일관된 글로벌 보고 체계를 유지하고 혼합 접근 방식은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유로시프도 공정한 정보 제시 원칙과 정보 이용자의 관점에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전반을 다루려는 초안의 방향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보고 범위의 선택적 적용과 EU 분류체계 정보의 배제는 수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의견 제출은 지속가능성 공시 규제의 국제적 일관성과 기업 부담 완화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비EU 기업의 공시 부담을 줄이려는 제도적 유연성이 투자자에게 필요한 정보의 축소로 이어진다면 지속가능금융 체계의 신뢰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두 단체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결국 쟁점은 역외 기업에 대한 공시 부담을 어디까지 완화할 것인지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의 소재지에 따라 지속가능성 정보의 투명성에 차이를 두는 것이 과연 공정한 시장 질서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환경·인권 영향을 EU와 직접 관련된 사안으로만 한정해 평가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