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스코프 3' 데이터는 얼마나 진실한가
지정학적 불안정성과 규제 속도 조절론이 교차했던 지난 몇 년간의 혼란을 뒤로하고, 이제 글로벌 기업의 80%는 지속가능성을 비즈니스 생존을 위한 필수 '코어 역량'으로 정의하고 있다.
플래닛리터러시 전문 필자인 류종기 EY Sustainable Finance(ESG) 담당 상무가 지난해 11월 발간된 MIT대 '지속가능한 공급망 연구소'의 ‘공급망 지속가능성 실태 보고서’를 통해 올해 가장 높은 장벽으로 예고되는 '스코프(Scope) 3'와 데이터 신뢰성 문제를 짚어본다.
지난 2년간은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지형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지정학적 갈등,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제적 불확실성, 그리고 각국 정부의 정책 변화는 기업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에서 환경 규제 속도 조절론이 대두되면서,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MIT대 지속가능한 공급망 연구소와 공급망관리 전문가 협의회(CSCMP)가 전 세계 1,200명 이상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공급망 지속가능성 실태 보고서'는 예상 밖의 결과를 보여준다. 전 세계 97개국 1,200명 이상의 공급망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심층 조사 결과,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약속은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입증했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3%는 거시적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성 목표를 유지하고 있으며, 12%는 오히려 그 노력을 강화했다. 목표를 축소했다는 응답은 15%에 불과했다. 이는 지속가능성이 더 이상 규제 대응을 위한 수동적 과제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 생존과 경쟁 우위를 위한 내재적 전략으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규제 주도형(EU)과 시장 주도형(북미)의 간극
특히 지속가능성 목표를 외부에 공개한 기업일수록, 이를 의사결정에 반영할 확률이 74%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공개적 약속(Public Commitment)'이 실행을 담보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지'와 '실행' 사이에는 여전히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특히 기업 탄소 배출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스코프 3(Scope 3)' 영역에서 데이터 부족과 방법론의 한계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다. 여기서는 <MIT대 공급망 지속가능성 실태 보고서>를 중심으로 2025년 공급망 지속가능성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북미, 유럽, 그리고 아시아 기업들이 직면한 과제와 해법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한다.
지속가능성을 추진하는 동력은 지역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글로벌 공급망 전략 수립의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우리 기업이 납품해야 할 고객사가 유럽에 있느냐, 북미에 있느냐에 따라 요구하는 데이터의 성격과 압박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 기업들은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등 강력한 '정부 규제'를 가장 큰 동인으로 꼽았다. 조사 결과 유럽 기업의 60% 이상이 "규제로 인한 지속가능성 강화 압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유럽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성이 선택이 아닌 '면허(License to operate)'가 된 셈이다. 이로 인해 유럽 기업들은 표준화된 정보 공시와 데이터 거버넌스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아시아 기업의 지속가능성 전략: 규제와 자본시장 사이의 방어적 대응
반면 북미 지역은 양상이 다르다. 정부 규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투자자'와 '이사회'의 요구가 핵심 동인으로 작용한다. 북미 기업들은 기후 리스크를 재무적 리스크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규제 준수 자체보다는 투자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리스크 관리 역량'과 '장기적 가치 창출'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어떠한가? 아시아 기업들은 유럽의 규제와 북미의 자본 시장 요구를 동시에 받는 '샌드위치'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아시아는 글로벌 제조 기지로서의 역할 때문에, 공급망 상류(Upstream)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 관리 압박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MIT 연구 결과, 아시아 기업들은 지속가능성 목표 달성에 대한 확신 수준이나 구체적인 실행 도구 도입 측면에서 유럽 기업들에 비해 다소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시아 기업들이 지속가능성을 '내재화된 전략'보다는 '외부 요구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스코프 3의 사각지대: '엑셀'에 갇힌 아시아의 데이터 경쟁력
오늘날 공급망 관리자의 가장 큰 고민은 단연 '스코프 3'다. 스코프 1(직접 배출)과 스코프 2(구매 에너지)에 대한 측정 및 보고 체계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인 스코프 3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연구에 따르면 기업 40% 이상이 스코프 1, 2를 관리하고 있는 반면, 스코프 3을 추적하는 비율은 현저히 낮다.
유럽 기업들은 전과정평가(LCA) 툴이나 탄소 회계 전문 소프트웨어 도입 비중이 약 36%로 가장 높아 데이터 고도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북미의 경우 재무 데이터(Spend-based)와 산업 평균값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 실제 공급망 내의 구체적인 감축 노력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아시아의 높은 '엑셀' 의존도, 왜 문제인가?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측정 도구의 낙후성이다. 2025년 현재에도 글로벌 기업의 상당수가 여전히 MS 엑셀이나 구글 시트 같은 '스프레드시트'를 주요 측정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지역별 비교에서 아시아 기업의 스프레드시트 의존도는 58.3%로 나타나, 북미(50.0%)나 유럽(32.7%)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스프레드시트는 접근성이 좋지만, 수천 개의 공급업체 데이터를 수기로 취합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쉽고(Human Error), 데이터의 무결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실시간 공급망 변동을 반영하지 못한다. 이는 향후 CBAM 등 글로벌 규제가 요구하는 정밀한 데이터 검증(Third-party Audit) 단계에서 아시아 기업들이 '데이터 신뢰성 부족'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저탄소 노력을 왜곡하는 재무 기반 산정의 역설
재무 데이터(Spend-based) vs. 실측 데이터(Supplier-specific) 데이터의 '질(Quality)' 측면에서도 격차가 존재한다.
북미 기업들은 주로 '재무 데이터(지출 기반 산정)'와 '산업 평균값'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100만 원어치의 자재를 샀으면 그 산업의 평균 배출 계수를 곱해 탄소량을 추산하는 식이다.
이 방식은 계산은 쉽지만, 기업이 비싼 돈을 들여 '저탄소 자재'를 구매해도 구매 금액(Spend)이 늘어나면 오히려 배출량이 증가한 것으로 잡히는 역설이 발생한다.
반면, 유럽 기업들은 공급업체로부터 직접 데이터를 받는 '실측 데이터' 비중이 높다. 이는 공급업체의 실제 감축 노력을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시아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엑셀과 평균값 의존에서 벗어나, 공급업체별 실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디지털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산업 간 경계를 넘는 '연결'의 힘
측정이 1단계라면, 실제 감축은 훨씬 더 고차원적인 2단계 과제다. 기업들이 꼽은 스코프 3 감축의 최대 장벽은 '불확실한 투자 수익률(ROI)'(56%)과 '공급업체에 대한 영향력 부족'(44%)이었다.
공급망의 말단에 있는 중소기업(SME)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중소기업의 약 49%는 "고객사(대기업)가 친환경 제품에 대해 추가 비용(Green Premium)을 지불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가장 큰 장애물로 꼽았다. "돈은 더 안 주면서 탄소만 줄이라"는 요구에 직면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 간 협력(Collaboration)'이 필수적이다. SteelZero나 RE100 같은 이니셔티브가 대표적이다. 협력에 참여한 기업들은 배출 데이터 개선, 전문성 공유, 정책 영향력 확대 등의 이점을 보고했다.
그러나 산업 협력 참여도에서도 지역 간 불균형이 감지된다. 유럽 기업들은 42.3%가 지속가능성 연합이나 공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반면, 아시아 기업의 30%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이는 북미(21.4%)나 유럽(16.7%)의 미참여 비율보다 높은 수치다.
탈탄소화의 최전선: 기술 환상을 걷어내고 '효율'을 택하다
아시아 기업들이 협력을 주저하는 주된 이유는 '비용, 역량의 한계(Cost/capacity limits)'와 '데이터 공유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아시아 공급망 특성상, 당장의 비용 증가를 감수하면서 장기적인 감축 프로젝트에 투자하거나 민감한 운영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물류(화물 운송) 부문은 스코프 3 배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자, 기업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분야다. MIT 보고서는 보고서는 화물 운송의 기술적 대안을 시계열로 분석했다.
기업들은 화물 운송의 탈탄소화를 위한 당장 적용 가능한 대안으로 '바이오 연료(Biofuels)'을 꼽았다. 단기(1~3년) 적으로 바이오 연료는 기존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어 가장 실용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기존 내연기관 트럭을 그대로 쓰면서 탄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운영 효율성(Operational Efficiency)'이다. 경로 최적화, 적재율 향상 등은 탄소도 줄이고 비용도 줄이는 '후회 없는(no-regrets)' 전략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1순위로 채택하고 있다.
중기 관점에서 배터리 전기차(BEV)는 도심 및 지역 운송에서 점차 경쟁력을 확보하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장기(4~10년) 관점에서 수소(Hydrogen)는 장거리 대형 화물 운송의 경우 배터리의 무게 한계로 인해 수소가 궁극적 해법으로 꼽히지만, 인프라 구축 비용 문제로 인해 장기적 미래 기술과 과제로 분류된다.
생존을 넘어 도약으로: K-공급망의 '회복탄력성' 방정식
아시아 지역의 경우, 인프라 부족과 초기 투자 비용이 저탄소 운송 수단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었다. 이는 정부 차원의 인프라 투자와 보조금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수출 의존도가 높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 활약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엑셀 경영'에서 탈피해 데이터 투명성 확보에 나서야 한다. 아시아 기업들의 높은 스프레드시트 의존도는 더 이상 용인되기 어렵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은 점점 더 정교한 실측 데이터(Primary Data)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ERP 등 내부 시스템과 연동된 자동화된 탄소 회계 시스템을 도입하여 데이터의 신뢰성을 국제 표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데이터가 없으면 규제에 대응할 수도, 고객을 설득할 수도 없다.
둘째, 규제 대응을 넘어선 ‘회복탄력성'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규제를 피하기 위한 수동적 대응이 아니라, 공급망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능동적(Rule-setter)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가능성 목표를 외부에 공개한 기업일수록 의사결정의 효율성과 투자가 활발했다. 한국 기업들도 명확한 목표를 공시하고 이를 이해관계자들과 투명하게 소통함으로써 시장의 신뢰를 선점해야 한다.
협력사 지원은 비용이 아니라 리스크 투자다
셋째, 협력사와의 '상생형 감축 생태계' 구축이 절실하다. 대기업 단독으로는 스코프 3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아시아 기업들이 겪는 '비용 및 역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대기업은 협력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 기술 교육, 데이터 측정 도구 보급 등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협력사를 돕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자신의 스코프 3 리스크를 낮추는 가장 확실한 투자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시대이지만 준비된 기업에게 불확실성은 위기가 아닌 기회다. 공급망 지속가능성은 기업이 외부 충격을 견디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게 하는 '회복탄력성'의 근원이다.
결국 2026년의 승자는 규제를 '비용'으로 보는 기업이 아니라, 투명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급망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증명해내는 기업이 될 것이다.